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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Jun 19. 2021

K장녀가 겪은 엄마의 뇌경색

https://bit.ly/3cB1Nb8


  엄마는 드라마를 유독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주말 저녁 8시 가족드라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수하신다. 아무리 그렇다 해뇌경색 판정을 받은 날에도 서럽게 울다가 <한 번 다녀왔습니다>를 시청하겠다고 할 줄이야.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는 아직도 판단이 어렵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작년 여름. 부모님과 십 분 거리에 독립해서 살고 있던 나는 모처럼 주말에 일찍 눈이 떠져서 책 한권을 들고 동네 카페로 나서려던 중이었다. 현관문 앞에서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너희 엄마 이상하다. 내 말은 안 들으니깐 네가 와서 응급실 데리고 가!”

  “다짜고짜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엄마 풍 온 것 같아.”


  나는 전화를 끊고 부모님 댁을 향해 달렸다. 분명 뛰고 있었는데 자꾸만 제자리로 느껴졌고 발걸음보다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손에 들고 있던 소설책 한 권은 어디로 내팽개쳤는지 기억이 없다. 우여곡절 끝에 엄마를 모시고 집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지만 주말이라 사람이 넘쳐났다. 간이 병상에 누워있던 엄마가 계속 중얼거렸다. “요즘 새벽까지 유튜브 보고 핸드폰 과하게 사용해서 전자파 중독 증상이야. 분명해. 뭣하러 응급실까지 데리고 와. 한의원 가면 돼. 한의원 가서 침 맞으면··· ···.”


  엄마의 한의원 타령에 나는 불쑥 답답함이 올라왔지만 전자파 중독이든 아빠 말대로 풍 증상이든 간에 검사를 해보자고 엄마를 다독였다. 옆 병상의 어린 아이는 빽빽 울고, 앞 병상에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고래고래 간호사를 불렀다. 넋이 달아나고도 남을 분위기에서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의 손을 쥐고 진찰 순서가 오길 기다렸다. 엄마의 입술은 왼쪽으로 살짝 돌아가 있었고 눈자위도 어쩐지 위아래 위치가 조금 다른 듯 했다. 가만히 엄마 손을 잡고 있자니 어젯밤 공원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일찍 퇴근을 하고 오랜만에 엄마와 집 앞 공원을 산책했더랬다. 여름밤이라고 해도 꽤 늦은 시간이라서 모자를 푹 눌러쓴 엄마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경보를 하며 종알종알 대자 엄마가 무어라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순간 늘어진 인절미처럼 말을 끌며 어눌하게 얘기하는 같아서 엄마에게 또박또박 말하라고 잔소리를 했다. 평소엔 나보다 더 당차게 걷던 엄마가 자꾸 뒤쳐지는 게 아닌가. 나는 팔을 강하게 휘저으며 빠르게 걸어야 운동이 된다고 잔소리를 하자 엄마는 급발진난 자동차처럼 소리를 질렀다. “야아, 너가 머언데 나안테 이래 저래라야아-.”


   ‘그날은 이상하게 그러고 싶더라고?’ 어떤 사고나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시작하는 말의 서두는 늘 이렇. 평소의 나였다면 분명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엄마와 짧게 다투다가 사과를 했든가, 입을 다물고 툴툴거리면서라도 함께 운동을 마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전자파 중독 때문에 말이 느린거라고 다시 한 번 언성을 높이는 엄마를 뒤로하고 나는 미련 없이 내 집으로 가버렸다. 그맘때 엄마는 통화를 하면 자꾸 전자파 얘기를 했다. 밤낮없이 전화를 하고 핸드폰을 만졌더니 전자파 중독으로 머리가 띵띵하다고. 나는 뒤돌아서 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핸드폰만 만지래, 라면서.


  전날 밤 일을 한참 떠올리는데 주말 당직을 서던 의사가 엄마를 진찰했다. 정밀한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뇌경색 증상인 것 같다고 했다. 엄마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세상에 오십 중반 밖에 안 된 내가 뇌경색이라니, 라며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검사 결과는 금방 나왔다. 엄마는 뇌경색 판정을 받았는데 전조증상이 있고도 남았을 거란 의사의 말에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미 한 달 전, 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시금치를 잡으면 바닥에 떨어뜨리고 사과를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 사과가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https://bit.ly/2Styv7h


  그 순간 집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아빠가 생각났다. 전자파 중독이라면서 아빠까지 대동하고 싶지 않다는 엄마의 말에 집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입원 수속을 기다리며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를 두고 잠시 복도로 빠져나와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엄마가 뇌경색 진단을 받았다고 조심스럽게 말하자 “괜찮아. 요즘엔 의술이 좋아서 다 고쳐.” 라고 애써 덤덤하게 말하는 아빠의 목소리에서 떨림을 느꼈다.


  아빠는 오전에 있던 엄마의 증상을 전화로 상세하게 전했다. TV 어느 프로그램에서 라면에 다시다를 넣으면 감칠맛이 생긴다는 걸 보고 라면을 끓여 드셨다고 했다. 라면을 후루룩 잡수시면서 안방에 있는 엄마에게 소리쳤다고. "당신도 라면에 다시다를 한 숟갈 푹 떠서 넣고 먹어봐. 아, 요상하게 맛있어?" 라고 했더니 엄마가 대꾸가 없더란다. 그래서 TV에 열중하며 밀린 드라마를 보는데 어느새 식탁에서 엄마가 라면을 드시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당신이 이쪽으로 와서 선풍이 머리 내 쪽으로 돌려봐. 아, 너무 더운데?" 라고 하자 엄마가 거실 선풍기가 있는 곳으로 성큼 걸어왔다고 했다. 엄마가 선풍기 머리를 아빠 쪽을 향해 돌리려는데 자꾸 허공에 손짓을 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아빠가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입도 눈도 살짝 돌아가서 경미한 안면마비증상을 보였다고 했다. 그런데도 엄마가 계속 괜찮은 척 하며 선풍기 머리를 향해 헛스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빠의 기나긴 증언이었다.


  왜 그랬을까? 엄마는 왜 세상 물정 모르는 아둔한 사람처럼 전조증상을 한 달 씩이나 묵혀두었을까. 말도 안 되는 전자파 타령을 하면서 말이다. 입원 수속을 마치자 엄마는 대학병원 집중치료실로 갔다. 코로나라 직계가족 한 명만 병간호를 할 수 있다고 했고 나는 집에서 일주일 정도는 너끈히 쓸 짐을 챙겨왔다. 입원 날 저녁, 엄마는 병상에 달린 식탁을 펴고 말간 쌀죽을 먹었다. 입으로 가야하는 숟가락이 자꾸 입꼬리를 쿡쿡 찌르며 조준에 실패하자 엄마가 숟가락을 내려두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바보가 됐어.”


  엄마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목 놓아 우는 걸 나는 난생 처음 봤다. 무어라 위로하기가 힘들었지만 분명한 건 내가 더 크게 울면 안 된다는 걸 직감으로 알았다. 엄마를 안아주며 위로하자 점점 더 크게 울던 엄마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까지 소환하며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외쳤다. 정신이 없으셨는지 갑자기 내 멱살을 움켜쥐고 우셨는데 나는 멱살을 선뜻 내어드렸다. 어느새 간호사가 뛰어 들어오더니 엄마의 손을 잡고 조용히 울었다. 나는 그 간호사가 고마워서 눈물이 흘렀다. 엄마는 아기처럼 나를 부둥켜안더니 무서워서 말을 못했다고 엉엉 울었다. 뭐가 무서웠냐는 나의 질문에 엄마는 아픈 몸이 되면 가족들에게 짐을 줄까봐 스스로 병을 외면했던 것 같다면서 더 서럽게 울었다.


  가족들이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왜 미련을 떨어서 골든타임을 놓쳤을까, 왜 어젯밤 공원에서라도 전자파 때문이 아니라 몸이 이상하다고 딸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묻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나는 무척 속이 상했지만 나이 먹어가는 사람의 감정을 내가 어떻게 전부 헤아릴 수 있겠냐 싶어서 눈물을 삼켰다.


  어느 정도 감정이 진정됐는지 엄마는 갑자기 <한 번 다녀왔습니다>를 봐야한다며 리모콘을 찾았다. 감정몰입이 안 된다며 간이침대로 내려와 드라마에 푹 빠졌다. 그날은 기운이 없어서인지 평소처럼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훈수를 두진 않았지만 엄마는 정말 집중하고 있었다. 대학병원 집중치료실은 불을 끈 새벽까지도 분주한 느낌이었다. 간호사들이 실시간으로 환자 상태를 체크하러 다녔다. 나는 간이침대에 누워 심전도 모니터와 곤히 잠든 엄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엄마는 두려웠을 것이다. 혹시나 내가 크게 아픈 거라면 가족들에게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봐, 자신의 역할이 줄어들까봐 겁이 났던 거다. 지금의 엄마는 분기별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가고 약을 타 먹고 안면마비도 호전되어 비교적 잘 지내고 있다. 물론 여전히 자주 침대에 누워야하고 장을 보러 마트 가는 것 말고는 멀리 돌아다니거나 좋아하는 등산을 갈 수도 없다. 그래도 엄마의 몸은 나아지고 있는 것 분명하다.


  어쨌든 한 달 동안의 대학병원 입원치료 기간부터 최근까지 아픈 엄마와 난 사소하게 티격태격했다. 몸이 힘든 엄마 대신 집안일 좀 하라고 동생들에게 잔소리를 했더니 왜 엄한 애들에게 부담을 주냐며 티격태격.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부모님 댁에 가서 화장실 청소를 하고, 밀린 설거지를 하며 한숨을 쉬었더니 힘들면 하지말지 힘든 티낸다고 한바탕······. 열 번 잘해봤자 K 장녀의 설움 운운하며 빽, 한 번 지르고 나면 도로 아미타불이다. 엄마와 나의 관계는 늘 그랬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서로 체감해간다. 엄마는 일 년 전 대학병원 퇴원 날, 링거를 꽂은 손으로 내 양손을 꼭 쥐며 말했다. 첫째 딸인 네가 본인을 살뜰히 챙겨줘서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노라고.


  엄마는 본인을 환자 취급하는 것이 누구보다 싫은 것 같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자꾸 신경 쓰이지만 엄마의 건강에 과도하게 몰입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직은 뇌에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엄마는 설거지를 하다가 힘들면 푸푸, 소리를 내며 숨을 억지로 내쉬고 침대로 가서 눕는다. 나는 거실 식탁에서 그런 엄마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책을 읽는다. 그러다가 기분이 내키면 무심하게 다가가 말한다.


  “푸푸 여사님. 주말인데 가족들이랑 집 앞 고기 집 가서 외식이나 할까?” 엄마는 푸푸 여사라고 놀림을 받아 약이 오른다며 침대에 누워 주먹을 쥐는 시늉을 하고 웃는다. 외식을 하면 주말 저녁 8시 드라마 앞부분을 보지 못할 것 같다고 거절하신단다. 나는 더 이상 집안 한 구석에서 조용히 숨을 몰아쉬는 엄마에게 호들갑을 떨며 머리가 아프냐고 되묻지 않으려 한다. 엄마가 먼저 손을 내밀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줄 뿐이다. 나는 K 장녀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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