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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Jun 17. 2021

사랑의 확신

 “첫 만남은 거북했지.”


  친구의 솔직 발언에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한창 달콤한 분위기의 신혼집 집들이에서 모두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곧바로 “내가 만난 남자들 중 가장 이상해보였어.” 라고 한 번 더 쐐기를 박자 나와 또 다른 참석자 H는 친구 남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려와 달리 그는 나의 친구이자 본인의 아내에게 가소롭다며 크게 웃어보였다.


  “나도 너 처음에 별로였어.” 질세라 맞받아치는 그는, 말과 다르게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친구를 쳐다보며 안주를 집어먹었다. 안도한 H는 친구 부부를 향해 결혼할 사람은 첫 느낌부터 다르다던데, 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나도 맞장구를 쳤다. 어느덧 삼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고 보니 소위 결혼감은 촉부터 다르지 않을까 은근히 궁금했었다. 사랑의 완성이 반드시 결혼은 아니라지만 연애가 더 이상 연애로 끝나지 않고 결혼까지 이어지는 인연은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내 질문에 친구 신랑이 운을 뗐다.  “그럴 수도. 하지만 난 정말 이 사람이랑 결혼할지 몰랐어. 오히려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내 생에 이렇게 많이 싸운 여자는 처음이었으니까.”


  바통 터치를 하듯 친구가 와인 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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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돌이켜보니깐 결혼 전 사귀었던 남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더라고. 한없이 다정하고 모든 받아주던 남자들이지만 먼저 이별통보를 했고 이유를 물어보면 다 똑같았지. 본인은 널 감당할 그릇이 안 된다 떠났지만 이 사람은 다르더라고. 연애 초반에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는데 내가 눈물을 뚝뚝 흘려도 아닌 건 아니라단호하게 말하는 거야. 한 번을 안 봐줘. 그러면서 나한테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나. 나는 너의 치명적인 단점을 알지만 떠나지 않을 거라고. 너의 단점이 장점을 이기지 못하니깐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나한테 말했었어. 나는 이 사람 만나고 진짜 내 모습을 알게 된 것 같아.”


  그동안 내가 찾아 헤맨 사랑의 확신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런 종류의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문득 스쳤다. 내 연인이 지닌 최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누리기 위해서 최악의 모습도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 공고한 나의 세계를 부수고 들어오는 상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두렵지 않은 인연이라면 감히 사랑을 확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나부터 좋은 사람이 되자.’ 나는 이십대에 사랑의 쓴맛을 여러 형태로 맛보고 나서 이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 요즘 끼리끼리는 사이언스란 말이 있듯이 더 성숙한 내가 될수록, 걸 맞는 사람이 다가올 거란 확신. 그러나 서로의 가장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어도 아, 그렇구나 하고 녹아드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서로답게 사랑하는 자연스러운 형태의 사랑일거다.


  흔히 결혼할 사람은 첫 눈에 알아본다고 하지 않나. 결혼할 상대를 처음 만났을 때 후광을 보았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어본 것 같다. 정말 그런 인연이 따로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는데 첫 만남은 거북했지만 만날수록 진국인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 되었다는 친구의 말이 와닿았다. 내가 와인 잔에 가득 술을 채우자 친구와 그의 남편은 가볍게 어깨동무를 하고 주방으로 가서 이것저것 안주거리를 더 챙겨왔다.


  H는 얼마 전 끝낸 나의 썸남 얘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내가 그 썸남과 막을 내린 이유를 알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얘기가 흘러나왔다. “결정적으로 아닌 부분이 보여서 끝냈지만 괜한 죄의식이랄까. 어쩌면 그 사람이 가난하지 않고 화목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랐더라면 결말이 달랐을 수도 있지 않겠어.”


  나는 마음이 써서 잔에 담긴 와인을 몇 모금 만에 다 마셨다. 친구가 재빨리 오븐에 구운 연어갈비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내 입으로 냉큼 넣어주었다. H가 방울토마토를 오물오물 삼키며 말했다. “가난하고 상처가 있어도 확신이 있었다면 넌 분명 고, 했을 거야. 사랑에 진심이니깐.” 나는 확신이라는 단어를 듣자 방금 씹은 연어 살점이 가슴을 쿡쿡 쑤시는 것처럼 느꼈다.


  사랑의 확신이라는 건 무엇일까. 내가 어떤 게 확신일까 되묻자 친구도 친구의 남편도 심지어 H도 의견이 분분했다. 한참 사랑을 확신한다는 것에 대해서 토론 비슷한 대화가 오고갔지만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H가 사랑의 확신은 그냥 느낌인 걸로 대충 퉁치자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나는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던 의도도 있지만 썸남과 있었던 엉뚱한 상황 하나가 떠올랐다.


  두어 번쯤 그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자신의 자동차로 바래다주던 남자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지 집근처 공원에서 바람을 쐬다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른 봄의 저녁 날씨가 제법 쌀쌀해서 우리는 차 안에서 서로 정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갑자기 차 안에서 지독한 방귀냄새가 났다. 나는 냄새에 민감한 편이지만 남자를 배려하는 마음에 꾹 참아보았다. 한참 말을 이어나갔던 남자가 말을 멈추더니 운전석과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썬루프까지 열어젖혔다. 나는 이런 분위기에서 저 아닌데요, 라고 말하기도 뭐해서 그냥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던 기억이 났다.


  우리의 썸이 방귀냄새로 끝난 것은 아니다. 그 후 몇 번이고 좋은 분위기에서 만남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에어컨 필터 때문에 자동차 안에서 방귀냄새가 날 수 있단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다. 그 남자와 나는 서로를 지독한 방귀냄새가 나는 사람으로 의심한 채 평생 살아가게 되는 건가, 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자 혼자 웃음이 터졌다.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방귀 냄새 하나 누가 주인인지 확신하지 못하는데 사랑의 확신이 쉬울 리 없다. 내가 깔깔대며 웃었더니 모두 내 웃음의 출처가 궁금한 표정이었다. 어느 정도 취한 탓인지 도수가 높아서 쓰게 느껴지던 와인이  달았다. 그저 나와 당신의 다음 사랑은 꼭 달콤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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