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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Jun 21. 2021

날 사랑하지 않는다던 남자와의 파혼

https://bit.ly/3q7CsLa


  어떻게 하면 자극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파혼이라는 주제, 나로서는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다. 언젠가 출판사 재직 당시 친하게 지내던 회사 선배에게 자문을 구한 적이 있다. “내 파혼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을 연재할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그 때 돌아온 선배의 대답은 썩 긍정적이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널 파혼녀 프레임을 씌워서 판단한다는 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닐 거라는 반응이었다. 하긴, 그 때 구구절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다면 글이 아니라 공감을 구하는 구걸이 되기 십상이었을 거다. 그 시절 내 마음은 한겨울 칼바람보다 날카로워서 금방이라도 살갗을 베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담백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내 마음이 담백하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자 가벼운 마음으로 노트북을 켰다. 주변이든 뉴스를 보든 간에 과거보다 분명 이혼율은 급증했다. 그러니 파혼은 그에 비하면 큰 에피소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결혼 3주 전에 날 사랑하지 않는다던 남자친구의 고백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갈 것은 분명하다. 자칫 비련의 여주인공, 사랑받지 못한 여자의 슬픔 따위로 비춰질까봐 겁이 났다. 그러나 이 경험도 많은 시간이 흐르자 저절로 담백해진다.


  이십 대의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하자면, 껍데기의 나를 제외한 내면의 나를 오롯이 사랑하지 못했다. 늘 남과 비교하며 조금 더 우위를 선점하지 못한 나를 나는 못마땅해 했다. 처음에야 파혼을 하고나서 감정의 사기를 당한 기분 혹은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운운하며 온갖 슬픔을 그대로 껴안으며 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고작 이십 대 중반을 넘은 나이에 내 자신 하나 사랑하지 못했던 영혼이 선택한 남자가 나를 온전히 사랑해주기를 바랐던 건 도박에 가까운 행위였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를 가스라이팅 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했던 그 시절의 나는 분명 그 남자를 사랑했었다. 사랑의 형태가 모든 이에게 다르게 정의된다지만, 누군가는 파혼을 했단 이유만으로 의리가 없는 변덕적인 감정, 풋사랑, 이기적인 사랑 등으로 재단하여 말했다. 그러나 남녀 관계는 둘 만 아는 법이다. 아니 때로는 그 둘도 시간이 훌쩍 지난 뒤에야 조금씩 진실의 진위를 가리게 되기도 한다.


  구구절절한 사건 전개는 필요 없다. 누가 더 잘했고 못했는지 따질 이유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는 내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야.” 저 말 그대로 나는 결혼 3주 전 날 사랑하지 않는다던 남자와 파혼했다. 겉보기엔 미안한 듯 했지만 은근히 내 가슴팍을 후벼 파기 위해 작정한 그 눈동자를 지금은 잊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고 알게 된 건, 그 말이 정말 사실이라기보다는 본인의 상처를 방어하려는 겁쟁이의 외침이었던 것만이 명징할 뿐이다.


  나도 나를 사랑하지 못했고, 그 남자도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으며 우리는 서로를 감싸기엔 부족했었다. 어쨌든 파혼이라는 에피소드 자체는 나를 무너뜨리진 못했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던 그 남자의 말도 나를 완전히 파멸시키진 못했다. 그보다 내 마음을 헤집어놓은 건 함부로 추측하고 마음대로 지껄이는 사람들의 말이었다. 사람들은 내 생각보다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았고 함부로 추측했으며 마음대로 내뱉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 남자 어딘가 모르게 음흉해 보였다니깐?”, “신경 쓰지 마. 그 사람이 널 뭐라고 흉을 보고 다니던 사람들은 파혼한 사람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볼 거야.”, “결국 욕심 아니겠니? 좋은 남자 찾는 욕심에 치명적인 단점이 안 보인걸 수도.”


  놀라운 건 나는 그들이 꺼내는 말 이전에 파혼과 관련한 어떠한 것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평소 충고를 하지 않던 사람들마저 인생의 승리자라도 된 듯 이런 저런 말들을 훅훅 던졌다. 이십대 중반의 나는 그때부터 사람이 지닌 아름다운 이면 안에 서린 질투와 타인의 슬픔에서 건져 올린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배웠다.


  한동안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했다. 증오했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치를 떨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도 누군가를 함부로 재단하고 추측했으며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 살아간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서 사람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저마다 다르다. 삼십대 중반인 지금도 사랑을 함부로 정의내리기 힘들다. 다만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에는 늘 사랑이 필요하고 그 사랑은 항상 서툴고 실수투성이라는 거다.


  우리는 모자라다. 사랑에 모가 나 있거나 진짜 누군가를 사랑하기엔 어딘가 모자란 상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사랑에 목말라있을지도. 지금 누군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내가 나를 온전히 끌어안을 때 다른 누군가도 나를 바라봐준다. 누군가 나를 바라봐주지 않을 때도 괜찮다. 그때야말로 비로소 내가 나를 보듬어줄 시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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