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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Jun 24. 2021

너, 빽 있어?

  2000년도 청소년들은 빽이란 비속어를 심심찮게 썼었다. 조선 시대 음서제도도 아니고 빽이라니. 지금이야 금수저나 흙수저처럼 수저 논란이 있는 시대라지만 그 시절엔 집안 배경을 묻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네 뒤를 봐주는 무서운 선배 라인이 있냐는 의미로 쓰였다.


  “야 너 빽 있어? 없으면 깝치지마.” 지금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발언이지만 그땐 골목 어귀나 학교 주변 음습한 곳에서 꽤 들리던 말이었다. 남학생은 케이싱 안에 속이 꽉 찬 소시지 같은 교복 바지에 삼선 슬리퍼를 끌고 슬렁슬렁 걷는다. 여학생은 이마에 바짝 붙인 깻잎 머리를 매만지며 나지막이 읊조린다. “야, 너 빽 있어?” 


  지금 누군가 빽 있니?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럴싸한 브랜드의 가방 하나쯤 소지하고 있냐는 말로 들릴 가능성이 크다. 행여나 개인의 집안 배경을 묻고 싶은 거라도 당신의 백그라운드가 어떠냐는 무례한 말을 대놓고 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어쨌든 2000년도에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그때 처음 하굣길에 여자 선배들한테 둘러싸여 “야 너 빽 있어? 없으면 우리 밑으로 와.”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들었다.


  그로부터 일 년 뒤,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짓은 안 하고 살았는데도 왜인지 빽, 빽 거리는 소리를 듣는 일이 또 발생하고야 말았다. 나름 각 동네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모여서인지 학기 초에 이러쿵저러쿵 많은 소문이 돌았다. 옆 반 남학생 한 명이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도 돌기 시작했는데 그 친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아이였다. 그 시절에도 반 단위로 학예회를 했었는데 우리 반에서는 집에 근사한 캠코더를 가지고 있는 아이가 그 남학생 뿐이라 반대표로 학예회 날 캠코더를 가지고 왔었더랬다. 당시 그 남학생은 워낙 소심한 성격이여서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혹시 집에 캠코더 있는 사람 있니?” 라고 물었을 때 그렇게 빠른 속도로 저요, 저요 라며 손을 번쩍 들 줄은 아무도 몰랐었다.


  그 남학생은 학예회 때 일일 카메라맨을 자처하며 캠코더로 반 아이들을 촬영했다. 나름 6학년 졸업반이라고 유치한 장기자랑보단 그 시절 우상이었던 HOT와 젝스키스, SES, 핑클 등의 춤을 추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서 담임 선생님이 반에 설치된 멀티비전으로 캠코더 테이프를 돌려 보자고 하셨고 그 소심한 남학생이 어쩐 일인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반에 설치된 멀티비전으로 학예회 영상이 상영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반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꺄-.


  세상에. 친구들의 춤을 감상하며 박수를 치는 내 얼굴을 느닷없이 줌으로 당겨 밀접 거리에서 롱테이크 기법으로 찍어낸 게 아닌가. 주목 받는 걸 즐기지 않던 나는 그때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 없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그 남학생에겐 고백을 받은 적은 없었다. 다만 나를 제외한 모든 반 친구들에겐 나를 좋아한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나와 그 남학생은 이렇다 할 감정을 나눈 것 없이 중학생이 되었고 그 아이는 우연히 나의 옆 반으로 배정을 받게 되었다.  나는 중학생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남학생이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만으로 옆 반 일진에게 어퍼컷을 맞았다. 이건 지금 생각해도 조금 우울한 일이긴 하다.



https://bit.ly/3zQhwNb


  내가 그 놈의 빽, 빽 거리는 소리를 들은 건 나를 좋아한다던 옆 반 남학생을 좋아하는 일진 여학생 때문이었다. 이건 뭐 삼각구도도 아니고 여기서 중요한 사안은 난 아무것도 자처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나중에 소문을 듣고 보니, 일진 여학생이 학기 초에 그 소심한 남학생에게 고백을 했는데, 그 남학생이 나를 초등학생 때부터 좋아하고 있단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14살. 상당히 어린 나이다. 갓 중학생이 된 80킬로그램은 육박하고도 남을 체격의 여학생. 패싸움을 하고 다닌다는 일진 여학생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상 무서운 게 없었나보다. 어느 화창한 봄날의 쉬는 시간, 복도에서 친구와 수다를 떨던 내게 다가와 가차 없이 얼굴을 때렸다. 


  나는 졸지에 학기 초부터 짠함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체구는 작지만 마음만은 한 깡 했던 내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친구와 말싸움조차 심하게 해본 적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맞은 것이 억울해서 되지도 않는 여린 힘으로 일진 여학생의 머리를 한 대 퍽, 때렸다. 곧바로 일진 여학생의 무차별적인 따귀세례가 이어졌다. 다시 수업이 시작되는 종이 울렸고 그제야 일진 여학생의 구타가 멈췄다. 


  1분 같은 10분이었다. 고개를 들자 긴 복도 끝까지 싸움 구경난 학생들로 북적였다. 나는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지만, 그 와중에 도도한 척 고개를 빳빳하게 들며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질했다. 긴 복도를 둘러싼 학생들을 지나쳐 복도 끝 계단을 이용해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로 이어지는 계단 난간까지 학생들이 빨랫줄에 걸린 빨랫감처럼 걸려있었다. 여기저기서 “어떻게. 엄청 아프겠다.”, “불쌍해.” 라는 말이 작게 들려왔다. 그 많은 아이들 중 교무실로 뛰어가 선생님한테 싸움을 말릴 생각을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단 건 너무한 일이다.


  어쨌든 빨래처럼 계단 난간에 줄줄이 소시지로 달린 아이들을 뚫고, 교무실에 도착했다. 옆 반 담임이던 음악선생님부터 찾았다. 무슨 일 때문에 찾아왔냐는 음악 선생님에게 다짜고짜 말했다. “선생님 반에 일진이 저를 때렸어요. 학교 측은 저를 위해 어떤 보호를 해주실 수 있나요?” 


  그 후 많은 일이 있었다. 옆 반 담임 선생님과, 우리 반 담임 선생님, 나와 그 아이와의 4자 대면, 그리고 그 소심한 남학생을 포함한 5자 대면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를 아끼던 체육 선생님이자 학생 주임이던 선생님께 일진 여학생은 몽둥이로 엉덩이를 실컷 맞기도 했다. 그래도 한동안 하굣길에 옆 반 아이들 중 그 일진 여학생을 추종하는 학생들 몇몇이 집에 가는 나와 내 친구들의 등 뒤에 대고 자주 외쳤다. “야, 쎈 척 하지 마. 빽도 없는 게 어디서 깝쳐.” 가만히 길만 걸어가던 내게 그 애들은 매번 깝치지 말라고 했다. 꼴값은 지들이 떨면서 그런 말을 하니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무시했다. 그러자 어느 날, 반응이 없던 내게 약이 올랐는지 무리의 아이들 중 한 명이 친구 손을 잡고 하교 중이던 내 어깨를 잡으며 길을 막았다.


  “야, 너 빽 있어?” 

  그 질문에 나는 되물었다. 

  “빽 있냐고? 응 있지.”

  “뭐? 너 어떤 선배 아는데?”


 내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발밑에 단면이 잘린 빨간 벽돌을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이 내 빽이다.” 


  덤덤히 말하며 그 벽돌을 깝죽대던 아이들 틈을 빗겨서 바닥으로 세게 내리쳤다. 


  그보다 더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너 중학생 때 뚱뚱이 일진한테 심하게 맞은 적 있다며?” 라는 말을 종종 듣고 살아야만 하는 숙명을 받아냈다. 나는 그때마다 물어본 친구가 무안할 정도로 응, 맞아. 라고 쿨하게 대답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질문은 내가 대학생이 되자 더 이상 듣지 않게 되었다.




  어째서 우리의 인생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을까. 사회 초년생 때 작은 공모전에 수필을 써서 당선된 적이 있다. 상금으로 고액의 상품권을 받은 나는 그 당시 남자친구를 이끌고 디지털 카메라를 사러 전자제품 판매점에 갔었다. 남자 판매원에게 카메라 설명을 한참 듣는데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 한 명이 그 남자 판매원에게 밥 먹었냐며 눈인사를 찡긋하고 계산대로 갔다. 누가 봐도 둘은 연인 사이 같았다. 어라, 저 여자 낯이 익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 내가 중얼거리자 카메라 설명을 나보다 더 자세히 듣던 남자친구가 “누군데?” 라고 물었고 카메라 성능에 대해 설명하던 판매원도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도무지 누군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아무래도 잘못 본 것 같다고 하고 카메라 설명을 마저 들었다. 


  사고자 했던 카메라 기종을 정하곤 간 터라 나는 그 자리에서 카메라를 골랐다. 판매원은 새 상품을 계산대로 가져다주겠다며 계산대 앞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어느새 카메라를 가지고 온 남자 판매원은 자신의 여자 친구로 예상되는 여직원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누구누구야, 이거 구입하신대. 계산해드려." 나는 그제야 그 여직원의 정체를 알아챘다. 


  여직원은 어릴 적 일진이었던 그 뚱뚱이였다. 살이 너무 빠져서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던 거다. 내가 지갑을 열다말고 그 여직원의 얼굴을 꼿꼿하게 쳐다보자 그 여직원은 드디어 계산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어? 여직원은 본인도 모르게 다시 한 번 어? 라고 소리를 냈고, 남자 판매원과 내 남자친구도 어? 하는 표정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이번엔 남자 판매원이 내게 물었다. 


  “이 친구 아세요?”

  나는 그 찰나에 많은 생각이 스쳤다. 과연 무어라 말하는 것이 최선일까.

  “잘 알죠. 저희 중학생 때 옆 반 사이였는데 꽤 친했거든요. 잘 지냈니?”


  혹자는 굳이 미화하여 말할 필요가 있었냐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단연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자리에서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건 모두가 무안해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계산대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얼굴이 빨개진 일진, 아니 여직원의 모습에서 이미 상황의 열쇠는 내게 전부 넘어온 거라고 말이다. 


  고작 열네 살에 당한 어퍼컷의 후일담을 풀어놓자면, 옆 반 담임에게 당차게 나의 권리를 찼아대던 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몸에서 이상징후가 나타났다. 좁은 공간에 있으면 숨 쉬기가 곤란함을 느꼈던 거다. 그러다 한 번은 종례시간에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지기도 했다. 나는 그 후 몇 년 동안 경미한 폐쇄 공포증과 시선 공포증을 앓았다. 지금은 극복했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서 그 여학생을 용서한 것이 아니다. 내 상처를 내가 극복했기에 과거의 그 뚱뚱이 여학생은 이미 내게 무의미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 여학생이 지금은 조금도 밉지 않다. 살아가면서 내가 아팠던 만큼 너 또한 아플 것이 인생의 이치임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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