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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Dec 18. 2023

집으로 가는 길  

사람은 무엇이든 닥치면 하게 되어있다 프랑스에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일은 프랑스인과 대화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바보스러운 가, 프랑스어를 배우러 갔으면서 프랑스인과 대화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는 것이... 하지만 1년 동안 수 없이 많은 일들을 겪고 난 뒤, 나는 1년이 지난 시점에서 프랑스인과 말하는 것이 제일 괴로웠고 전화로 프랑스어를 말하는 것을 최악으로 생각했다. 덕분에 그곳에서 개통한 나의 프랑스 전화번호는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그저, 프랑스에 있는 한국 친구들과 잠깐 이야기할 때나 프랑스에서 무언가를 가입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프랑스 전화번호가 오늘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것도 배우 나쁘게. 바로, 공항 가는 택시를 예약하기 위해서...


나는 며칠 전에 이메일로 택시 예약을 마쳤다. 하지만 택시기사가 갑자기 일정을 조율해야 하는 바람에 아침 일찍이 전화를 건 것이다. 잠이 덜 깬 모습으로 전화를 받으니 그나마 할 수 있었던 프랑스어도 사라진 느낌이다. 하지만 공항에 가기 위해선, 비행기를 타기 위해선, 그리운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그 택시를 타야 한다. 이 시골에서 택시를 잡기란 하늘에 별따기이고, 우버는 당연히 없다. 그러니 나오지 않은 프랑스어로 대화를 이어간다. 다행히 친절했던 택시 운전기사 덕분에 약속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다. 


십 여분의 전화를 끊으니 몸에 땀이 흥건하다. 교통 접근성이 좋지 않은 곳에서 택시를 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했지만 허망하기도 했다. 이렇게 쉽게 해결 수 있었는데 나는 그동안 왜 전화통화 한 통 못하고 살았을까, 전화로 끝내면 되는 쉬운 모든 업무들을 직접 찾아가거나 메일을 보내는 수고를 했을까, 게다가 나의 짧은 프랑스어를 미안해하며 상대방에게 내용을 메일로 보내줄 수 있냐며 그들을 얼마나 수고롭게 만들었을까... 허탈한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못쌌던 짐을 마저 싸기 시작한다. 


코로나 19 시대를 살아가고, 프랑스에 살아가면서 큰 즐거움 없이 살아갔다. 꾸준히 하던 운동을 쉬어서 그런지 상상치 못할 정도도 나는 무기력해졌다. 그래서 모든 것을 미루고 또 미루며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는데 오늘은 그런 내가 참 원망스럽다. 며칠 전 Etat des lieux de sortie*를 하러 주인아저씨가 왔을 때, 집의 상태를 보곤 비행기를 미룰 수 있으면 며칠 더 있어도 된다는 친절을 베풀었다. 1년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떠나야 했기에 집이 어수선해야 하는데 평소와 다름없는 나의 집 상태를 보고 집주인은 흠칫 놀랐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이야기했고 아저씨는 "bah**"를 외치며 특유의 손짓을 하며 집은 충분히 깨끗하고 퇴거한 뒤에 청소하는 마담이 올터니이 청소는 하지 말고 쓰레기만 방 중앙에 모아놓고 나가도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배려 가득한 집주인의 말들에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청소까지 완벽하게 하고 나갈 거라 다짐했었는데, 갑자기 빨라진 택시기사의 픽업시간에 조급해하며 몸을 움직이고 있다. 


꽤 긴 시간 동안 몸을 부저린 히 움직여서 겨우 짐을 다 쌌다. 집주인의 예상처럼 청소는커녕 쓰레기를 중앙에 모아놓은 채, 일 년 동안 정들었던 집을 둘러볼 겨를도 없이 그렇게 도망 나오듯이 빠져나왔다. 다행히 운전기사는 친절했고 그 덕에 이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상황이 차분해지니 갑자기 무릎이 아파온다. 프랑스에 살면서 몇 가지 겪은 사건들로 인하여 시간엄수는 나에게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급히 캐리어를 끌고 나가다가 아파트 안뜰에서 또 넘어졌다. 프랑스에 도착한 첫날 넘어졌던 곳이다. 수미상관의 법칙으로 처음과 끝을 같은 곳에서 넘어졌다. 하긴, 프랑스에서 삶은 넘어짐의 연속이었다. 처음 넘어지면서 급하게 살지 말고 여유롭고 차분하게 살자라고 다짐했었는데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보니, 오늘 욱여넣은 짐처럼 매일을 꾸역꾸역 버티며 살아왔다. 무언가 서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너무 신파가 될 것 같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다보았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한 번 환승을 해야 한다. 우리 동네에 있는 작은 공항에서 파리까지 간 뒤, 파리에서 9시간 환승시간을 견뎌 파리에서 인천행 비행기에 탑승해야 한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오늘은 누군가가 말을 걸지 않기를 바라보며 자리를 찾는다. 그리고 조금 뒤 나의 옆자리에 노신사가 자리 잡는 것을 보며 지긋하게 눈을 감는다. 프랑스에 일 년간 살면서 몇 가지 능력을 갖게 되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지, 안 걸지' 구별하는 능력이다. 나의 구별 감각으로 이 노신사는 나에게 말을 시킬 것이 뻔했고 나는 프랑스어로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싫어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음료서비스가 시작되자마자 할아버지는 정중하게 나를 깨워 음료 서비스가 시작되었다며 알려준다. 그리고 시작된 프랑스어 말하기 시험, 파리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에 비하면 정말 짧은 시간의 비행이지만 이 시간이 나에게는 참 긴 시간이 되었다.  



* Etat des lieux de sortie : 프랑스에서는 집을 임대하면 두 번 상태 점검을 한다. 입주와 퇴거 시에 두 차례 실시하며, 물건이나 집이 파손되었을 경우 보증금에서 일부 금액을 제외하고 나머지 금액을 반환받을 수 있다. 

**Bah : 프랑스인들이 자주 쓰는 의성어이다. 여기서 집주인은 "설마, 글쎄"라는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건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특권 같은 거야."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마트에 가서도, 카페에 앉아있을 때도, 기차에서도 언제나 프랑스인들은 나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나는 프랑스에서 살면서 학교 선생님들, 그것도 내가 매우 신뢰하고 좋아하는 몇몇의 선생님, 을 제외하고 프랑스인들이 말 시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어려가지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건 화장품을 사러 화장품 가게에 갔을 때, 나의 한국식 발음을 교정시켜 주기 위해 내가 물어본 제품은 뒤로 한채 열 번이 넘게 'Bonjour'를 시킨 점원을 만난 뒤 혐오 아닌 혐오를 하게 되었다. 오늘도 역시나 비행기 옆자리에서 계속 말을 시키는 할아버지를 만나 속으로 한숨을 내뱉으며 '이 놈의 프랑스'를 외치고 있었다. 이런 나의 어려움을 선생님들한테 토로할 때면 선생님은 어느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은 특권 같은 거라며 그 시간들을 누리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프랑스를 떠나온 지금, 나는 가끔 외국인들을 거리에서 마주칠 때면 그들이 나에게 길을 물어보기를, 그가 프랑스인이기를 바라본다. 지금 나는 프랑스어로 누군가와 굉장히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그때 그 시간들을 즐기지 못한 것이, 그리고 재미있게 프랑스어를 배우지 못한 것이 지금은 매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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