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처럼 융합된 세상을 향해

다문화와 인종주의에 대하여

by 이여름


나의 집에서 30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커다란 사과 농장 단지가 있다. 친구들과 여름 방학을 맞아 산장을 가기 위해 지나고 있던 그 길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과를 따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다들 어떤 이유로 한국에 와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함부로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조심해. 거기 외국인 노동자들 있잖아.” 산장을 간다는 나의 말에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친구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외국인 노동자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존재”, 더러는 “무서운 존재”까지 되어있었다. 그들이 본인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다른 언어를 쓴다는 이유로 공포 프레임을 씌우고 그들을 배제하는 사람들을 보며 의문을 품었다. 저 사람들이 없으면 우리나라 농업에 얼마나 큰 손실이 있는지 알고 있을까? 취업난을 외치면서 블루칼라 직종은 절대 하지 않으려는 젊은 사람들이, 사과를 따는 노동의 중요성에 대해 알까? 결국 그 어떤 노동도 그것이 없으면 내 삶이 불편해지기 때문에, 함부로 경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까. 이들은 돈을 위해서 경제적 이민을 한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결혼 이민자를 제외한 외국인 노동자나 기타 이민자가 사회 통합이나 지원의 대상에서 소외된다. 이들은 사회적, 정책적 담론이나 지원에서 경시되기도 한다. 바로 이 점이 아직까지도 오늘 날 우리나라 이민 정책의 문제 중 하나이다. 산재 사망 사고 1위를 기록하는 우리나라는 자국민들이 일을 하다 죽는 것에도 관심이 없지만 외국인 노동자가 일하다 죽는 것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다. 이렇게 이들을 소외시키고 관심조차 주지 않는 것은 명백한 차별에 해당한다.


얼마 전 약 400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우리나라로 입국했다. 이것은 정치적 박해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이민이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통역과 의료진 등으로 한국 정부의 활동을 도왔다가 탈레반의 보복을 피해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타국의 사람들이라면, 더군다나 한참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열악한 환경의 사람들이라면 그 사람들을 받아들여 수용하게 되는 지역 주민들에게 반발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아프간 난민들을 수용하게 된 주민 대표는 “한국 군인과 정부를 도운 사람들을 어떻게 외면하느냐”며 그들을 인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했다. 또한 한국 전쟁 당시 우리 또한 국제 사회의 도움으로 큰 고비를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을 예로 들며 역지사지의 뜻을 밝혔다. 낯선 이방인의 등장이 힘들게 느껴질 법도 한데 주민들은 인도적인 마음으로 그들을 받아들이자는 결심을 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우리가 낯선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막연함을 넘어서 우리 또한 우리만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문화주의는 주류집단이 인종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소수인종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줌으로써 문화적 다양성과 사회의 통합의 조화를 추구한다. 다문화 주의는 주류와 소수인종이 서로 다른 문화의 내용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기보다 문화적 차이가 분명하기에 다른 문화를 인정하면서 공존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주류사회가 소수인종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배려해 사회통합을 이루어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프간 사람들은 그저 고맙다고 이야기 하지만, 우리 또한 그만큼 그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있다. 그리고 그런 도움이 없었더라도 함께 어우러져 가는 삶 속에서 인도적인 차원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만큼,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써 잘 정착해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포용하고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중 일부분





시 ‘꽃’은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존중하는 것의 중요함을 말한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마주한다. 무심하게 지나갈 수 있는 사람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그 사람은 온전한 객체로서 존중받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 그러니 우리가 비록 각자 다른 환경 속에서 자랐을지라도,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고 인식함으로써 알록달록한 색이 융합된 꽃밭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융화하려는 노력을 함으로써, 우리가 보다 나은 문화를 가지고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견고한 정책을 가지고 사람들을 수용해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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