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복 가방을 잃어버린 일
빈티지샵에서 구매한 수영복을 잃어버렸다. 서핑을 위해 구매한 수영복도 잃어버렸다. 작년 여름에 구매한 체크무늬 수영복도 잃어버렸다. 수영복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다. 돌아오고 난 저녁에 짐정리를 하며 이 사실을 깨달은 나는 멘붕에 빠졌다. 이를 어떻게 해야하지? 특히나 빈티지 수영복의 경우에는 직접 다른 나라에서 바잉해온 것이기 때문에 절대 다시 구매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수영복이었다. 모든 수영복의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눈물이 주륵 흘렀다. 너무, 너무 속상했다. 내가 머물었던 공간들을 모두 차근 차근 생각하며 수영복 가방의 행방을 찾았다. 어렴풋한 기억 속의 수영복은 수연이와 머물렀던 바다에도, 잠시 옷을 재정비 하기 위해 멈추었던 길목에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차량을 기다리며 잠시 앉아있었던 정자에도 있었다. 어디든 있을 것만 같았고 그곳을 다시 가면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다음날, 아침에 날이 밝자마자 나는 월정리로 떠났다. 몸이 너무 힘들었지만 그 하루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수영복 가방을 찾는 것. 오후에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과외도 예정되어 있던 하루라 더더욱 처졌다. 너무 우울해서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결국 다시금 그곳을 가서 따가운 여름에 온 몸이 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마을을 온종일 뒤졌다. 어디에도 나의 수영복은 없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게 얼마나 소중한 수영복인데...
결국 잃어버린 채로 미리 봐두었던 카페에 들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무엇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카페를 들르자 마자, 마법을 건 듯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카페가 너무 예뻤다. 손님이 없던 독채 공간은 마치 내가 피아노의 숲 속 주인공이 되어 평화로이 책을 읽는 소녀가 된 기분이 들게 했다. 수영복을 잃어버린 슬픈 나는 온데간데 없이 밝은 모습으로 책을 읽고 사진을 찍고, 스무디를 먹으며 행복해 하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졌다.웃기는 일이었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이토록 단순한 일이라니. 이후에 들른 책방은 더더욱 좋았다. 아무도 없는 책방에서 평화로이 책을 읽었다. 햇살이 따갑게 들어오는 공간에서 거울을 보다 문득 내 갈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놀랍도록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였다. ‘그래. 수영복 좀 잃어버리면 어떠니. 앞으로 살 날은 많은데.’ 수영복을 찾지 못한 나를 자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일도 있는 거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더욱 세심하게 물건을 챙기게 되는 거니까.
언젠가 아이유가 했던 인상깊은 인터뷰가 생각이 났다. 기분이 우울할 때 ‘지금 이 우울한 기분을 내가 몇 시간 이내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이미 일어난 일에 슬퍼하지 않고 다시 훌훌 떨어버릴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수영복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린 뒤 그 마을을 떠날 수 있었다. 노을이 지는 저녁까지 그 마을에 머무르며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을 느꼈다. 처음 수영복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느꼈던 착잡한 감정부터 수영복을 찾지 못하고 절망했던 감정까지, 그러나 다시금 카페에 들어가 기분이 좋아지고 길을 물어보는 외국인에게 길을 알려줌으로써 내가 다시금 쓸모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던 일, 책방에 앉아 책을 읽으며 다시금 나는 소중한 사람이라고 토닥였던 일. 내게는 날 위로하고 자책하지 않는 방법을 알게된 커다란 성장을 한 하루였다.
때때로 내 자신이 방구석을 굴러다니는 먼지처럼 작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새로 구매한 와인을 개봉하려는데 와인 따개를 잃어버린 것을 이제야 알아차리듯,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하염없이 내 자신을 자책하는 날도 있다. 실수로 흔든 맥주캔이 폭발하는 꾹꾹 참아왔던 것들이 별 것 아닌 지점에서 폭발해 눈물을 펑펑 흘리게 되는 날이 있다. 하지만 어떠하랴. 인생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만큼 새로이 들이기도 하고, 펑펑 운만큼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게 되는 순간들이 온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힘겨워 하며 부서질 것만 같을 때 나는 주문을 외우고는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