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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quniill Apr 29. 2019

"정신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제10 일꾼의 말: 일잘러의 태도를 만들어준 말들 

제10의 일꾼
(대학병원에서 11년째 간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소아암 환자들을 주로 돌보고 있습니다.)
"정신력 같은 소리하고 있네. 정신력으로 버텨서 몸이 무너지면 일꾼으로서의 삶도 끝인 거야."


흔히 '정신은 육체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그 반대다. 정신력 운운하며 버티다가 저질 체력이 된 지 수년이 지났다. 무리한다 싶으면 몸에 바로 반응이 나타나고,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어김 없이 번아웃이 찾아온다. 체력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으니 피로와 우울이 내 바이오리듬과 함께한다. 몸이 축축 늘어지는데 정신력은 개뿔. 


유리 체력의 발단은 술자리였던 듯하다. 술이 안 받는 체질이다. 소주 한 잔만 들이켜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가슴이 빠르게 뛴다. 러시아 스파이들이 복용했다는 알약부터 808번의 실험 끝에 발명했다는 음료까지 알코올과 싸울 수 있는 병사들은 모두 찾아봤지만, 백전백패였다. 기자시절 술자리는 곧 취재 현장이었기 때문에 이런 체질은 '일잘러'가 되고 싶었던 내 발목을 잡았다. 


특히 '술은 정신력'이라는 술자리의 흔한 멘트는 술을 못 마시는 건 곧 일을 못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가느다랗게 실만 남은 정신줄을 잡고 또 잡으며 주량을 늘렸다. 한 잔에서 한 병이 되고, 한 병에서 두 병이 됐다. 어떤 술자리에서는 최후의 생존자로 등극하기도 했다. 


그렇게 알코올 쓰레기가 장족의 발전을 이룬 후 난 우리집 안방에서 쓰러졌다. 몸이 안 좋아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하러 가던 중 바닥에 머리를 '쿵'하고 박았다. 병원에서 받은 건강검진 결과표에는 온통 빨간불이 켜져 있었다. 의사는 심각한 얼굴로 '간이 부어 있다'는 진단을 하기도 했다.(같은 말을 했던 지인들의 얼굴이 떠올라 '픽' 웃음이 났다) 


소식을 들은 제10의 일꾼이 건강식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찾아왔다. 아플 때 더 생각나는 열번 째 일꾼은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11년째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정신력으로 버텼다'는 내 말에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불호령을 쏟아냈다. 


"정신력 같은 소리하고 있네. 무슨 회사가 잃어버린 조국이야? 독립정신 앞세워 네 몸 희생하는 거냐고. 회사에서 정신력 찾는 정신 없는 일꾼들 이야기는 듣지마. 그렇게 버티다가 몸이 망가져서 병원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정신력으로 버텨서 몸이 무너지면 일꾼으로서의 삶도 끝인 거야."


이 일을 있은 후 방송계의 '일잘러' 친구가 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했지만, 나와 같은 나이의 친구가 상상도 못했던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퇴근길 그 친구의 사무실 앞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눈이 퀭한 그를 맞았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인데, 우리는 이 담백명료한 목적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나보다 더 중요한 건 없는데 말이다.   


대개의 일꾼에게 직장생활은 단거리 달리기보다 마라톤에 가깝다. 42.195㎞의 장기 마라톤을 완주하려면 가장 중요한 건 페이스 조절이다. 단거리 달리기처럼 냅다 체력을 쏟아부으면 완주하기 전에 쓰러진다. 


나처럼 '쿵'. 


회사에서 만난 수많은 일꾼들은 정신력을 앞세우며 단거리 달리기하듯 42.195㎞를 뛰라고 이야기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렇게 말했던 일꾼 대부분은 지금 회사에 남아있지 않거나 소식이 끊겼다. 내가 알고 있는 이들 중 가장 오래 회사에 남아있는 이는 진짜 마라톤이 취미인 일꾼이다. 뭐든 항상 말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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