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큐레 Oct 03. 2020

망각의 반지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족의 이아페토스의 아들로 ‘먼저 생각하는 자’라는 뜻이다. 나는 어쩌면 에피메테우스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불을 도둑질한 죄로 p가 묶인 사슬을 벗겨냈고, 그 조각을 가끔 들여다보곤 한다. 불에 탄 건 그 녀석이지만, 그 그스름이 나에게도 조금은 묻어서 이렇게 회상해보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꾼, 이상한 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아 참,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생각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 반지는 우리 사이에서 ‘망각의 반지’라 불렸다. 원래는 p의 것이었다. 견습공이 연습 삼아 만들었을 법한 투박한 디자인의 반지는 보기와 달리 꽤 이름 있는 공방에서 주문 제작으로 만들어졌는데, 손가락 한 마디를 잡아먹는 넓고 평평한 겉에는 까맣고 정갈한 궁서체로 이렇게 쓰여있다. ‘忘却’


  이 반지가 녀석의 손가락에 끼워진 이유는 p의 전 여자친구 a 때문이다. 그녀는 내향 적이기 이를 데 없는 p의 마음에 ‘불을 질러 놓았다.’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p가 a를 만나면서부터 행동이나 말투가 상당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으스댄다고 해야 할까? 거만하다고 해야 할까? 


  p가 매달리다시피 한, 연애였지만, 우리는 내심 부러웠다. 녀석이 연애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만나는 일도 소원해졌던 게 사실이다.(고등학교 시절부터 함께하면서 정이 깊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여자친구 하나로 이렇게 소원해진다는 게 섭섭하기도 했었고, 녀석의 아니꼬운 행동, 이를테면 여자친구 자랑 같은, 팔불출 같은 모습도 꼴 보기 싫었다. 한마디 하려고 해도 괜히 시기심으로 보일까 입을 다물고 있던 차에 녀석의 이별 소식이 들려왔다.


  p의 반응은 드라마틱했다. 1. 자신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하였고, 2. 헤어졌다는 사실에 분노하다가 3. 술을 마시고 밤새 전화를 걸었고 4. 프로필 사진과 배경을 모두 검게 칠하고 5.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모든 것을 초탈한 표정이었다. 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반응인 '죽음의 5단계'와 정확히 일치했다.

  추문까지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추했다. p는 한없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녀석을 위로한 답치고 시꺼멓게 몰려다니면서 술자리며, 노래방이며, 클럽이며 여기저기 쏘다녔지만, p는 정신적 충격이 컸는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술만 연거푸 들이켰다.


  집으로 가는 길이 같았던 나는 p를 부축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우리의 우정이란 대개 술자리로 시작해서 벽에 기대 토악질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p는 한참을 게워내더니 나에게 다가와 안기려는 시늉을 했다. 입가에 잔해(?)가 옷에 닿을까 싶어 밀치려고 했지만, 이내 p의 표정을 보고는 팔을 벌려 안았다.


  “구웨에엑..”


  괴랄한 소리와 함께 가슴팍이 뜨뜻해졌다. 나는 p를 밀치며 죽고 싶냐고 소리 질렀다. p는 충격이 컸는지 콘크리트 담장에 몸을 기대고 말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진홍색 가로등 빛에 명암이 깔린 p의 얼굴 근처로 더러운 토사물이 흘러내린다. 짠한 마음에 다시 부축할 요량으로 녀석에 어깨에 손을 올리자 녀석의 손아귀가 내 팔을 잡고 쥐어짜기 시작했다. 엄청난 악력이다. 이어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아주 뮤지컬을 해라..”

  p의 손아귀에 힘이 풀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뻗어버린 녀석은 무거웠다.





  p는 그날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다시 군대라도 간 건가 싶을 정도로 연락이 없던 차, 불쑥 연락이 와서는 약 4주 만에 p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동안 단식이라도 했는지 해쓱해진 얼굴에 둥글고 순했던 눈매가 푹 꺼져서 마치 간디 같아 보였다. 술 잘 마시는 간디였다. 완전히 다 털었다고, 잊었다고 말했지만,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p의 말은 이상한 개그코드처럼 느껴졌다. 말과 행동은 반대였기 때문이다. 금연을 시작한 사람이 담뱃갑을 든 것처럼 휴대폰을 쥔 손이 달달 떨려왔다.


  그보다 눈에 띈 것은 녀석이 끼고 온 반지였다. 약지 한 마디를 넓게 감싼 은반지, 건틀릿 부속품처럼 튼튼해 보이는 반지는 한자로 무언가 쓰여있었다. ‘망’까지 읽을 수 있었다. p은 왼손으로 맥주 한 병을 쥐고 병나발을 불다가 말했다.


  “커플링 녹여서 만든 거야. 망각이라고 쓴 거고 두 명분을 녹여서 만들었더니 꽤 크더라”

p는 음각으로 새겨진 ‘망각’에 눈길을 두었다.

  “나 같으면 그거 팔아서 치킨 사 먹고 만다.”

  h가 한심스럽다는 듯 p를 바라보며 말했다. h는 p에게 a를 소개해 준 장본인이기 때문에 특히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가 있어?”

  p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런 건 그냥 잊는 거야, 뭐 그렇게까지 하냐?”

  h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게 한참을 둘이서 투닥투닥하더니 이내 묵묵히 술만 마시기 시작했다. h는 나도 한마디 거들라는 듯이 한번 툭 쏘아봤지만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았다. 내 말을 들어줄 녀석도 아닌 데다가 이미 많이 취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도 슬슬 술기운이 오르던 참이었다. 밤이 오고 있었다.


  참 아이러니한 물건이었다. 잊기 위해, 잊기 위한 증표를 만든 p는 그것을 간직하려 했다. 반대로 h는 잊기 위해 만든 ‘증표’도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잊는 것과 그냥 잊는 것, 잊는 법도 참 가지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휴대폰 앨범 비밀 폴더에 있는 옛 애인의 사진을 떠올렸다. 그런 걸 잊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렇게’ 잊었을 뿐일까?




  다 털었다고, 다 잊었다고 했던 p의 말은 역시 거짓말이었다. 그날 이후 p와는 다시 연락이 되지 않았고 다음 주도, 다다음 주도, 다음 달이 돼서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도통 연락이 없었다. h는 p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는지 여기저기 소문을 내게 들려주었다.


  “걔 내 전화는 받지도 않아”

  “나도 똑같지 뭐”

  휴대폰을 향해 내리깐 눈이 속눈썹에 가렸다. 문득 h의 콧날과 턱 선이 부각되었다. 평소 털털하고 헤벌쭉 한 모습과는 달라 영 익숙지 않았다. h는 말을 이었다.

  “들어보니까 자취방에서 맨날 술만 마시고 산다더라, 착하긴 한데.. 소심한 애라 걱정이야 네가 한번 가봤으면 좋겠는데, 같이 가도 좋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슬슬 걱정되던 참이야 도어록 비밀번호도 알겠다... 그냥 쳐들어가지 뭐, 우선 나 먼저 가볼게”

  h는 안심했는지 히-하고 웃어 보였다. 익숙한 모습이다.


  h는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혼자 믹스너트를 집어먹으면서 맥주를 한 병 더 시켰다. p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묘하게 인상이 흐려진 느낌이 들었다. 간디라면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었지만, p은 간디가 아니었다. 그 대신 반지는 또렷이 기억할 수 있었다. 투박하지만 은빛으로 빛나는, 궁서체로 섬세하게 두 글자가 새겨진, 나는 물든 그 반지를 p의 손가락에서 빼내야 한다는 생각에 미쳤다.




  d는 춤을 잘 췄다. 한 바퀴 돌아서는 몸짓을 따라 옷자락이 일제히 흩어지다 감겨든다. 하지만, d는 이런 옷을 입은 적이 없었고(그녀는 항상 편한 옷을 선호했다.) 화장을 하지 않았으며(이것도 참 매력적이었고) 춤은 감탄사의 일환일 뿐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었다.(대부분 멋대로 몸을 흔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면은 ‘비현실적이었다.’


  “근데 네가 그럴 자격이 있나?”

  다른 모든 것은 비현실적이었지만 직설적인 말투만큼은 여전했다. 나는 반가움과 불편함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d는 표정이 다양했다. 그녀는 연극과였고, 모든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좋은 사람을 연기하고자 했던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어쩌면 간파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주는 감정은 나에게 지나친 고열이었고, 고열에 증발하듯이 헤어진 후에는 연락도 없이 반년이 허무하게 지나가고 말았다.


  “차라리 걔가 인간적이지, 너는 도대체 뭔데”

  “넌 나를 감정 쓰레기통 취급했어.”

  내가 항변하듯 말했다.

  “그런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데?”

  “...”

  d의 몸짓은 더 격렬해졌다. 짧은 머리카락이 위로 솟는 모양이다. 그 모양이 마치 불꽃을 닮았다. 갑자기 사방에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숨이 막혔다.

  “사과라도 바라는 거야?”

  “아니 그냥 네 주제를 알라고”

  d의 웃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열기가 고조되면서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d의 동작에 어지러운 잔상이 겹쳐 보인다. 움직일 때면 팔이 네 개가 되었다가, 여섯 개, 여덟 개까지 늘어간다. 미간에는 붉은 눈이 하나 더 틔어져 왔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무서운 눈이었다.

  “그만해 내가 잘 못했어”

  나는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 순간 주변이 고요해지면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붉은 눈이 감기고 춤을 멈춘 d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났나 싶은 찰나 d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뭘 잘못했는데?”


  나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죽 미끄러졌다. 보일러를 세게 튼 모양이었다. 답답함에 보일러를 끄고 창문을 열었다. 그녀의 붉은 눈은 어디까지 보았을까? 비밀 폴더 속 사진? 가끔 인스타그램을 염탐이고 있는 모습? 아무래도 좋았다. p의 자취방에 가기 전에 비밀 폴더부터 열어 보았다. 그녀의 사진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것들을 모두 선택한 다음 휴지통에 넣어버렸다. 완전 삭제 버튼을 누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p의 자취 방앞에 도착하자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진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풀자 ‘삐빅-‘하는 수로가 들렸고,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입구로 쏟아져 나온 맥주 캔 몇 개가 내 발치로 굴러왔다.


  “와...”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의심했다. 알루미늄 광산을 차려도 좋을 정도로 많은 맥주캔이 쌓여있었다. p는 그 산(?) 꼭대기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나는 맥주캔 사이를 열심히 휘저으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헤엄치다 못해 등반하듯이 맥주캔을 밟고 올랐다. 맥주캔 틈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그 미친놈을 말려야 했다.


  “미친놈아!”

  진한 술 냄새에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녀석은 무언가 말을 하는 듯했지만 현가 꼬부라져 도저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알코올의 방향 때문인지 드잡이 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녀석의 손에 쥐어진 맥주 캔을 뺏어다 집어던지고 녀석 위에 올라탄 다음 턱을 향해 훅을 꽂아 넣었다. 제법 둔탁한 충격이 오른손에 감겨왔다. 하도 조용해서 기절했지 싶었는데 가만 보니 녀석은 고개를 모로 한 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한 달 넘게 맥주만 마셨을 테니, 눈으로 맥주를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짠한 마음이 들었지만, 독하게 마음을 먹기로 했다.


  내가 p의 반지를 빼려 하자 녀석은 단단하게 주먹을 쥐었다. 돌처럼 단단한 주먹이었다. 한 대 더 칠까 했지만, 인내심을 갖고 파고들자 녀석의 손에서 쓱-하고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드디어 p의 약지에서 반지를 빼내고 얼굴을 살폈는데, 수척한 얼굴에 마른 팔다리가 안쓰러워 보였다. 올챙이처럼 올라온 술배로 보아 한 달이 넘게 맥주만 마셔댄 게 분명했다. 약간 죄책감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곯아떨어진 녀석의 얼굴이 너무나 편해 보였다는 것이다.


  방안에 쌓인 맥주 캔을 전부 내다 버리는 데 3시간이 걸렸다. 인스턴트 북엇국을 사다가 끓여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p옆에 있어줘야 하나 생각했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한 달이 넘게 맥주만 마셔댔으니 제대로 된 밥을 먹고 나면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자력갱생하리라, 만약 그대로라면 h와 함께 찾아와 꽁꽁 묶어놓은 다음 알코올 병원으로 보내버릴 생각이다.


  다음 주, h와 나는 p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인류의 첫 액세서리는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을 구속했던 사슬을 갈아 만든 반지였다는데, p에게는 반대로 그 반지가 자신을 구속하는 사슬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불 도둑질을 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불장난도 마찬가지, 독수리든 맥주든 당신의 간을 쪼아 먹을지도 모르니

작가의 이전글 선풍기 속으로 사라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