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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 Aug 08. 2020

예술가는 왜 가난할까

문예창작과 학생이 전공서적을 쥐고있는 모습이다.

  예술가로 먹고사는 일은 힘들다. 예술 대학교에서 교수님들이 가장 난감해 하는 질문 중 하나도 "교수님, 이 과를 졸업하면 뭘 해 먹고 살 수 있나요?"와 같은 질문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일을 '작업'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작업을 위해서는 우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예술은 환상을 파는 장사이며, 예술가에게 예술가의 혼을 지켜가며 자립을 위한 수익모델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예술가는 왜 가난할까라는 질문을 확장하자면 


  1. 예술가들의 소득 수준이 낮은 이유

  2. 소득 수준이 낮은데도 하려는 이유

  3. 예술가는 사회 시스템의 희생자인가

  4. 예술가는 자발적으로 헌신하는가 

  정도로 나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이 일을 하는 이유는 첫째 생존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함이고 둘째 '그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이유가 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나는 예술가나 연예인, 종교인과 무속인이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속인이 앓는다는 '무병' 역시 생존과 생계를 위한 투쟁이라기보다는 자아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 상황이 아닐까 싶다. 모든 예술가가 그렇지는 않지만, 간혹 기행을 펼치는 예술가들도 비슷한 심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예술가에게 예술가의 혼을 지켜가며 자립을 위한 수익모델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혼을 지킨다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텐션을 유지하는 일이라고 하자. 예술가로서의 텐션을 유지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떼루아는 농작물을 기르는데 최적화된 환경을 의미한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작업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할 수 있고, 이 환경 안에서 작업을 해내기 위해서는 역시 돈이 필요하다. 떼루아를 조성하는 데는 돈이 들고, 작업환경을 만드는데도 돈이 든다. 그리고 예술가가 예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별개로 경제시장에서 예술 경제는 식품 경제와 동일하게 작동한다. 



떼루아(포도농장) : 새가 지저귀고 후광이 비치는 모습

  결국 공급과잉-> 불확실성 -> 기관과 정부의 의존 -> 프로젝트 레지던시로 이어지는 전 세계적 경향이 발생하면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자신의 커리어에 써넣기 위한 경쟁이 예술가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좋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갈수록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참여 없이 자신들의 차별성과 전문성만 강조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프로젝트레지던시는 또 다른 문제점을 낳게 된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이 높으면 도전이나 혁신보다는 성공적으로 보이는 모델을 모방한다. 유사한 작업, 유사한 커리어 빌딩, 유사한 제원 조성 등 행동 패턴이나 예술관을 모방한다. 예술이 죽었다, 예술이 망했다 와 같은 말들은 이런 곳에서 비롯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브레이크를 잡지 못한다. 지구가 파괴되는 줄 알면서도 비닐봉지를 계속 쓰는 이유와 비슷하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태, 이미 끝났다. "이미 끝났으니 그냥 즐기세요"와 같은 비관적 낙관주의가 나타나고 예술은 죽었다는 담론이 계속해서 재생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예술은 살아있고 많은 사람들이 도전하고 또 비관적 낙관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아방가르드 역시 태어나고 있다.(돈이 되지 않는 건 여전하지만)


  예술은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모인 곳이고, 사람이 너무 많다. 불확실성으로 비슷한 작품들이 마구 찍혀 나오기 시작하고 예술가는 이제 70년대와 같이 예술가가 중심이 되는 어떤 작업보다도 '제도적 행위자'라고 할 수 있는 예술 단체, 큐레이터, 기획자, 정부의 역할이 증가했다. 이는 안정성을 도모할 수도 있지만, 예술과 관련한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경제적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 오히려 접근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다고 큰돈을 들여 교육을 제대로 받고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참여한다고 해도 예술가로서의 성공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아마도 문학이 장르 중에서 가장 과잉공급이 두드러지는 분야일 텐데, 고시 패스하듯 등단에 성공한다고 해도 작가의 생명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내가 하는 작업이 남이 좋고 싫고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나이브 예술가가 되거나 아예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작업을 해야 하는데 전자는 역시 돈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후자는 예술가로서의 텐션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아무리 유사한 업종에 종사한다고 해도 자괴감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과거 후원자를 두고 공예품을 생산하던 차원을 넘어선 근현대의 예술은 어쩌면 인간의 실존적인 고민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젊은 데이비드 호크니, 귀티가 흐른다.

  그래서인지 요즘 호크니 같은 돈 많은 사람이 그린 그림이 보기에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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