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어지기 전 미리 행복 연습을 시작했다
아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어릴 땐 눈만 맞으면 만나서 노는 게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사는 게 바빠 시간을 쪼개고 쪼개야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반가울수록 더 아쉬운 마음이 들어 그런 감정은 숨기고 엊그제 만난 것마냥 가볍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이야 때깔이 더 좋아졌네~ 요즘도 잘 나가지?"
이 친구는 어려서부터 탄탄대로를 지나왔습니다.
20대 초부터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자리를 잡더니 금세 능력을 인정받아 지점장 위치에 올랐지요. 수입도 좋았고 일찌감치 결혼을 해 두 아이를 키우는 중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두 부부가 모두 바빠서 하루에 밥 한 끼 같이 할 시간도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아이들은 평일에는 할머니와 지내고 주말에만 엄마, 아빠를 만나고 있지요.
"그럼~ 잘 지내지. 넌 어때, 일은 좀 할만해?"
녀석의 답에 힘이 없었습니다. 속내가 궁금했지만 우리는 먼저 애들 크는 얘기부터 어른들의 안부, 아내와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로 예열을 시작했습니다. 한두 잔 술을 들이키고 나서야 녀석은 가벼운 듯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돈은 많이 벌고 있는데 행복하지가 않다.."
약간의 부러움과 질투심이 느껴져 조금은 퉁명스럽게 되물었습니다.
"배부른 소리하네. 그럼 어떻게 해야 행복할 것 같은데?"
이내 생각지 못한 답이 돌아왔습니다.
"글쎄.. 돈을 더 많이 벌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메르의 왕이었던 길 가메시는 막강한 힘을 가진 반신반인의 영웅이었습니다. 호사롭기만 하던 그의 삶은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목격한 후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인간의 유한함에 낙담한 길 가메시는 급기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원한 생명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갖은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그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그의 가슴은 절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방황하는 그를 향해 젊은 여인 시두리가 말했습니다.
"길 가메시여, 영원한 생명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보다 지금 당장 좋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십시오. 낮으로 밤으로, 밤으로 낮으로 춤추며 즐기십시오.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십시오. 깨끗한 옷을 입고 따뜻한 물로 목욕하며 당신 손을 잡아 줄 어린 자식을 낳고, 아내를 꼭 품어주십시오. 그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돈을 더 많이 벌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로 시작해 이런저런 넋두리를 한동안 나누고 돌아왔지만 생각은 좀 더 이어졌습니다.
'정말로 행복해지는 방법은 뭘까, 꼭 뭔가를 손에 넣고 이루었을 때만 행복할 수 있다면 그저 그런 날을 보낸 오늘의 나는 행복할 수 없는 걸까? 특별한 일이 생길 때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면 어쩌지? 그래서 진짜 행복이 왔는데도 그것이 낯설어 허둥대다 놓쳐버리는 건 아닐까. 길가메시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면 그는 행복해졌을까? 내가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게 언제였지..'
행복했던 순간보다는 행복을 바랐던 순간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 행복에 참 무딘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행복을 좀 연습해보기로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 진짜 행복이 찾아올지 모르니 미리미리 대비를 해두기로 한 것입니다.
하루를 돌아보며 '그나마 행복해해도 될 만한 일들'을 떠올려봤습니다. 크게 웃음이 나거나 소리를 지를 만한 일은 없었지만 뭔가 마음은 편안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처우가 썩 만족스럽진 않아도 사무실에는 내가 앉을자리와 커피가 있었고,
쉐프의 요리 같진 않지만 아내가 해준 따뜻한 밥과 국으로 배를 채웠으며,
부족한 나를 믿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습니다.
물론 늘 이렇게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벌써 속세를 떠나 가부좌를 틀고 어딘가 눌러앉았겠지요.
가끔은 지겹고 짜증이 납니다. 하나만 잘 풀리면 모든 게 다 잘 될 것만 같은데 그 하나가 결코 쉽게 허락되지 않더군요.
그래도 그 날 이후 이따금씩 행복을 연습합니다. 덕분에 기분이 썩 괜찮아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직 이게 행복인지, 아니면 언젠가 진짜 행복을 느끼게 될런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어제와 별 다를바 없는 오늘이었는데 말이죠.
<참고문헌>
Sandars, N. K. (2000). 길가메시 서사시. 경기: 범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