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의 부력-5부
전날 밤 창가에 걸어 둔 커튼이 아주 조금 열린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바닥에 얇은 직사각형을 만들었다. 민박집 주방에서는 커피 향이 일고 있었고, 그 뒤로 빵 굽는 냄새가 느리게 따라왔다. 나는 세면대에 얼굴을 비벼 헹군 뒤 거울을 보았다. 어젯밤보다 눈동자가 조금 덜 흐려 보였다. 얼굴을 닦고 방으로 돌아오니 수정이가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작은 노트, 손에는 펜을 들고.
“오늘 일정 체크 중이야?”
“응, 분실 접수 확인하고 Jared씨랑 연락해서 만나면 되겠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모든 과정을 폰으로도 찍어두자. 영상으로 남겨두면 나중에 전시회 때 쓸 수도 있을거야.”
수정이는 펜 끝으로 공중에 작은 사각형을 그리며 말했다. 프레임 표시처럼. 우리는 식탁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사장님이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제 이야기했던 카메라 말이에요. 오래 사진 찍으시던 한인 분이 계시는데, 오늘 오전에 잠깐 들르시겠다네요. 본인 카메라 한 대, 여행 기간 동안 빌려 주신다고요. 상태도 좋고, 잘 맞을 거에요.”
예상치 못한 도움은 항상 마음을 따스하게 만든다. 사라져 버린 것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신 계획이 원래의 궤도를 찾아가는 순간이었다. 나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한국에서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을 때와는 다른, 또다른 온기가 목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현관의 종이 가볍게 울렸다. 낮은 모자를 눌러쓴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선이 적은 얼굴, 눈웃음이 가득한 노년의 신사였다. 사장님이 이름을 소개했고, 그는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 동안 잘 쓰시고, 돌아가기 전날에만 꼭 상태 확인해서 돌려줘요. 떨어뜨리지 말고. 목에 꼭 걸고. 알겠죠?”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가방을 조심스레 열었다. 블랙 바디와 단렌즈. 손에 얹어 보니 무게가 익숙했다. 낯선데 익숙한, 이상한 기분. 셔터 버튼을 살짝 눌러 보았다. 전원 불이 켜졌다. 미세한 모터 소리. 작동에 문제 없었다.
“설정은 여기. 자동으로 두고, 빛 괜찮으면 조리개 조금만 열어요. 흔들릴 것 같으면 감도 살짝 올리고. 급할 땐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찍고. 흔들린 사진도 기록이니까.”
그는 짧게 웃었다. 어제의 내가 잃어버린 것은 ‘물건’이지만, 오늘 내가 빌린 것은 ‘기회’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간단히 메모를 써서 서로 주고받았다. 이름, 연락처, 대여 날짜, 반납 날짜. 글자들이 종이 위에서 고요하게 제자리를 찾았다. 나는 바디 스트랩을 목에 걸었다. 넥 스트랩의 천이 목덜미를 가볍게 스쳤다. 나와 수정이는 연신 감사하다고 외쳤다.
오전 10시. 하얀 구름이 아주 얇게 펴져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엄마가 교환학생으로 지냈던 대학으로 갔다. 정류장에서 내려 지도를 확인하니, 일렬로 심어진 나무들이 캠퍼스 쪽으로 길을 만들고 있었다. 잎사귀 끝이 햇빛을 튕겨냈다. 바람이 불때만 반짝이며. 캠퍼스 입구의 표지석. 이름의 첫 자음과 모서리가 강했다. 우리는 작은 계단을 올라갔다. 잔디가 넓게 펼쳐지고, 붉은 벽돌 건물이 이어졌다. 벽돌 사이 줄눈이 바둑판처럼 반듯했다. 반듯한 것은 마음을 안정시켰다. 나는 목에 걸린 카메라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조정했다. 스트랩 길이가 오늘의 호흡과 맞기를 바라면서.
“여기서 한 컷 찍자.”
수정이가 입구의 표지석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후다닥 몇 장을 눌렀다. 얼굴에 떨어지는 빛이 세지지 않도록 살짝 옆으로 틀었다. ‘찰칵.’ 단단한 소리가 귓속에 찍혔다. 찍고 난 뒤 화면을 훑자, 노출이 아주 조금 과했지만 괜찮았다.
“오늘은 기록자 모드 발동이야.”
수정이는 폰을 가로로 돌리며 내 옆에 섰다.
“은하씨 시작 멘트 해주세요.”
“아… 여기는… 엄마가 교환학생으로 지냈던 캠퍼스입니다. 오늘은 국제학생처에 들러서, 엄마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날 거예요.”
내 목소리가 화면 속에서 약간 낮게 울렸다. 걷는 소리, 잔디의 바스락 소리, 멀리서 들리는 벨 소리. 나는 카메라를 들고, 수정이는 폰을 들었다. 각각의 기계가 각각의 방식으로 여정을 기록했다.
국제학생처 건물은 유리와 금속, 약간의 콘크리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유리문을 밀자 ‘슥’ 하고 공기가 바뀌었다. 냉기가 얇은 막처럼 팔에 감겼다가 사라졌다. 안내 데스크에서는 친절한 미소가 우리를 맞았다. 나는 준비해 둔 문장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혹시 Jared 씨 계신가요? 한국에서 온 학생인데요. 미정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지… 저는 그분의 딸입니다.”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짧은 놀라움을 눈썹으로 스쳤다. 곧 전화기를 들었다.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더니 우리에게 손짓했다.
“잠시만요. 금방 내려오신대요.”
엘리베이터 옆, 회색 소파에 앉았다. 유리 바깥의 나무 그림자가 바닥으로 길게 들어왔다. 잎사귀의 가장자리가 떨렸다. ‘딸칵.’ 나는 그림자를 한 장 찍었다. 그림자는 흔들려도 예뻤다. 엘리베이터가 ‘딩’ 하고 열렸다.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넥타이는 느슨했고, 안경테는 얇았다.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걸음을 조금 빠르게 옮겼다.
“Are you… Eunha?”
“Yes. I’m Eunha.”
“And you’re Mi-jung’s daughter.”
“Yes.”
그는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한국말로, 서툴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미정… 생각 많이 했어요.”
그의 발음 속 ‘미정’의 모음들이 부드럽게 늘어졌다. 우리는 작은 미팅룸으로 안내받았다. 네모난 테이블, 의자 네 개. 창문 옆 블라인드는 반쯤 올라가 있었다. 빛이 가로줄로 바닥을 분절해 놓았다. 그는 물병을 내어 주며 말했다.
“먼 길 왔네요. 우선… 미정 소식은, 들었어요. 몇 년 전에… 다른 학생 통해서. 그때부터 마음이 계속… 뭐랄까… 안에서 조금씩 남아 있었어요.”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는 말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기다렸다. 기다림도 대화였다.
“당시 미정은… 아주 자신감 있었어요. 당당하고. 본인이 뭘 좋아하는지 알고, 그걸 하려고 했어요. 사진을 정말 좋아했죠. 저랑도 그걸로 금방 친해졌고요.”
그는 웃었다. 눈가가 얇게 접혔다.
“여기 캠퍼스 신문사, 구석에 작은 암실 있었거든요. 거기에서 몇 번 마주쳤어요. ‘이거, 핀 조금 앞에 맞았네요.’라고 제가 농담하면, 미정은 ‘그래도 빛은 내 편이잖아요.’라며 웃었죠. 그게 참… 멋있었어요.”
‘빛은 내 편.’ 나는 낯선 영어 억양 속 한국어 문장을 마음에 담았다. 엄마가 말하면 어떤 목소리였을까도 상상했다. ‘빛은 내 편이잖아요.’ 그 말끝의 올라감, 눈동자의 반짝임.
“그때도 카메라를 늘 들고 다녔어요. 누군가의 도와줌을 기록하겠다고 했죠.”
그는 손가락을 포개며 말했다.
“학생들 오리엔테이션 날, 국제 학생들 각자의 얼굴을 찍어서 우리 사무실 입구에 붙였거든요. 미정 사진은 이상하게 오래 사람들이 멈춰 보더군요. 그냥 웃고 있는 사진인데도… 보는 사람을 먼저 안심시키는 눈이었어요.”
수정이는 조용히 폰을 틀어 테이블 위에 눕혔다. 녹음. 나는 고개를 아주 조금만 끄덕여 계속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잠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미정이랑 같이 점심을 먹은 날이 있었어요. 풀만 있는 잔디 위, 커다란 나무 아래. 피자 한 조각을 나눠 먹었는데, 제 질문에 이렇게 말했어요. ‘Jared, 저는요, 모든 인연을 잘 기억하고 싶어요. 잊어버려도 다시 꺼내볼 수 있도록—사진처럼.’ 그게… 그게 저한테도 울림이 있었던 말이었어요.”
그는 은은하게 웃었다. 말이 끝나도 웃음은 바로 꺼지지 않았다. 조금 더, 여백을 유지했다.
“미정이 한국에 돌아가고 한동안 이메일을 했어요. 사진을 보내주기도 했고요. 그러다 바빠졌겠죠. 연락이 드문드문 해지다가… 멈췄어요.”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런 말… 실례일지 모르지만… 이렇게라도 당신을 만나서, 그동안 품고 있던 마음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나는 손가락을 테이블 아래에서 포개며 말했다.
“와주셔서… 아니요, 제가 왔죠.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가 여기서 어떻게 지냈는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듣고 싶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가 쪽으로 몸을 살짝 틀더니 말했다.
“혹시… 저를 찍어도 될까요? 미정의 이야기 옆에, 지금의 당신과 저의 이 순간을 남기고 싶네요.”
그 말은 내가 할 말이었다. 나는 웃으며 카메라를 들었다.
“창가 쪽으로 조금만 서 주실래요? 빛이 여기가 예뻐요. 어깨를 배경과 반 발만 분리해 주세요. 네, 그렇게요. 턱은 살짝만 내리고… 좋아요.”
그는 어색하지 않았다. 오래 학생들을 상대해서일까. 창밖에서 넘어오는 빛이 안경테를 얇게 감싸고, 광대뼈 아래에 아주 작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는 숨을 반만 들이쉬고 멈췄다. 오른손 검지가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
‘찰칵.’
셔터음이 미팅룸의 천장까지 가볍게 올라갔다가 사라졌다. 한 장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그래도 두 장을 더 찍었다. 하나는 웃음 직전, 하나는 웃음 직후. 순간들의 사이사이에 사람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Thank you, Eunha.”
수정이는 폰으로 우리가 대화하는 짧은 장면을 슬쩍 남겼다. 풍경 소리, 말 사이의 정적까지 들어갔을 것이다. 정적도 기록이었다.
“은하씨에게는 미정이 처음 왔을 때의, 그 ‘마음의 자세’가 보이네요. 신기하네요.”
나는 그 말을 마음 깊이 접었다. 종이처럼 접어 가방 안 가장 깊은 곳에 넣는 마음으로.
우리는 1층 로비까지 함께 내려왔다. 출입문 앞 바닥의 금속 띠가 낮게 반짝였다. 그는 문을 잡아 주었다. 바깥의 바람이 부드럽게 밀려왔다.
“If you ever need anything, just write to me. Email, phone… I’ll be here.”
그는 명함을 내밀었다. 종이의 감촉이 단단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그는 살짝 멈췄다.
“잘 다녀왔다고, 전해 주세요.”
말의 어순이 조금 흔들렸지만 의미는 또렷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럴게요.”
우리는 손을 흔들었다. 오래 흔들지 않았다. 그 사이에 충분한 마음이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햇빛이 벽돌 위에서 톡톡 튀었다. 수정이가 팔꿈치로 내 팔을 가볍게 건드렸다.
“충분히 기록했겠지 우리?”
“응 충분해.”
“그럼 캠퍼스 한 바퀴만 더 돌자. 어머니가 지나가셨을 법한 길로.”
우리는 벤치가 이어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나무들이 만든 그림자가 발목을 스쳤다. 나는 걸으면서 조금씩 찍었다. 빈 벤치, 자전거 바퀴, 잔디 위로 흘러가는 구름의 그림자, 도서관 계단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의 등. 내가 모르는 얼굴들, 그러나 사진 안에서 잠깐 ‘아는 느낌’이 되는 얼굴과 등들.
“현장 멘트 추가해주시죠 은하씨.”
수정이가 폰을 나에게 돌렸다. 나는 폰을 받아들고 렌즈를 바라봤다.
“여기는 엄마가 낮 시간을 많이 보냈을 잔디밭입니다. 여기서 누군가와 피자를 나눠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오늘 바람은 적당하고, 빛은 약간 따가워요. 빛은 내 편이라고 엄마가 그랬대요.”
말하고 난 뒤 조용히 웃었다. 수정이도 웃었다. 웃음이 영상에 들어갔다. 벤치 끝에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물이 입 안의 온도를 바꿨다. 혀의 뒤쪽이 조금 시원해졌다. 수정이는 옆에서 폰으로 짧은 컷들을 이어 붙이고 있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음악은 넣지 않았다. 오늘의 소리로 충분했다.
점심은 캠퍼스 안 작은 카페에서 간단히 먹었다. 샌드위치와 수프, 얼음물. 유리컵 바닥에서 얼음이 느리게 돌아갔다. 돌아가는 무늬를 멍하니 보다 보니, 분실물 센터에서 온 자동 회신 메일이 떠올랐다. 아직 별 소식 없음. 나는 폰을 들어 메일함을 확인했다. 새 메일은 없었다. 알림도 없었다. ‘사라지는 것을 붙잡지 않았고, 사라졌다는 사실만 기억했다’—그 문장을 떠올리다가, 오늘만큼은 붙잡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마음만큼은 잡고 있는 상태. 그 마음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조용히 내려놓았다. 오늘의 목적은 ‘찾기’가 아니라 ‘만나기’였으니까.
카페 창밖으로, 학생들이 각자의 속도로 지나갔다. 웃음소리, 속닥임, 스케이트보드 바퀴의 짧은 소음. 나는 카메라를 한 번 더 들어 유리창 너머로 눌렀다. 유리에 비친 내 얼굴과 바깥 풍경이 겹쳤다. 반투명한 합성. 엄마가 있었던 자리와 지금의 내가 겹쳐지는 느낌. 투명한 것들은 종종 더 단단했다.
오후에는 도서관을 들렀다. 도서관 안에는 딱딱한 소리가 없었다. 대신 수많은 ‘사각사각’과 ‘슥슥’하는 소리가 겹쳐져 있었다. 층계참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책등의 색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나는 과하게 찍지 않았다. 필요한 만큼만. 필요한 만큼이라는 것은 대개 ‘조금 적은 쪽’이었다.
창가 좌석 하나가 비어 있었다. 거기에 앉아, 엄마의 파란 끈 노트에서 옮겨 적어 온 이름 세 개를 다시 읽었다. Harris, Ava, Jared. 오늘은 그중 한 사람을 만났고, 내일 또 한 사람을 만날 것이다. 이름을 천천히 읽으면, 이름의 뒤에 붙어 있는 사람의 시간도 천천히 열린다. 수정이는 내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영상… 폰으로 찍은 것들만 이어도 꽤 좋아. ‘걷는 소리’가 많아서,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아.”
우리는 오래 앉아 있지 않았다. 도서관의 공기는 편안했지만, 머무는 것보다 걷는 것이 더 어울리는 날들이 있다. 오늘이 그랬다.
늦은 오후. 캠퍼스 서점 앞에서 작은 엽서 묶음을 샀다. 붉은 벽돌 건물 전경, 잔디, 기념탑, 야간의 도서관. 엄마가 본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전시회 한쪽에 이런 엽서들을 묶어 두고, 관람객이 하나씩 들춰볼 수 있게 만들 생각을 했다. 손으로 만져서 느끼는 이미지. 화면보다 더 오래 남을 기억.
해가 기운 쪽으로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졌다. 우리는 캠퍼스에서 나와 길을 건넜다. 자주색 꽃이 피어 있는 나무 아래, 바람이 한 번 크게 불었다. 꽃잎이 조금 떨어졌다. 떨어져도 예뻤다. 떨어지는 동안 확실히 ‘존재’했기 때문에.
“오늘의 마지막 컷.”
수정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캠퍼스가 뒤로 보이도록 서서, 카메라를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렸다. 셔터를 천천히 눌렀다. ‘찰칵.’ 한번. 그리고 폰을 들어, 오늘 하루의 마지막 말을 남겼다.
“오늘은 엄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을 겹쳐 보았습니다. 창가의 빛, 잔디의 온도, 한 사람의 기억 속에 살았던 엄마. ‘빛은 내 편’이라는 그 말을, 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말을 끝내니, 마음속에서 아주 얇은 금속 조각이 ‘딸칵’ 하고 제자리를 찾았다. 정확했다. 과하지 않았다.
민박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사장님은 우리 표정을 한 번씩 거울로 살폈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필요한 만큼 묻고 필요한 만큼 감탄했다.
“오늘은… 어떤 분을 만났어요?”
“엄마의 고마움과 멋진 기억이 남아 있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답했다. 사장님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가방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장비를 펼쳤다. 배터리를 충전기에 꽂고, 카드 리더를 연결했다. ‘우우—’하는 드라이브의 작은 회전음. 폴더가 떠오르고, 파일 이름들이 줄을 맞춰 섰다. 001, 002, 003… 나는 하나씩 클릭해 보았다. 창가의 Jared, 잔디 위 사람들, 계단의 그림자. 흔들린 컷도 있었다. 지우지 않았다. 흔들림도 오늘의 일부였다.
수정이는 폰에서 영상들을 끌어 와 간단히 자막을 얹었다. ‘국제학생처 앞’, ‘창가의 빛’, ‘Jared: “빛은 내 편”’. 흰 글자가 화면의 하단에서 얇게 떠올랐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이거, 전시회 때 짧게 틀어도 좋겠다.”
내가 말하자, 수정이가 미소로 답했다.
“그러자. 소리도 크게 말고, 작게. 귀를 가져와 듣게.”
우리는 오늘 찍은 것들을 분류해 작은 표를 만들었다.
— 사람: Jared(초상 3컷, 손 디테일 1컷)
— 장소: 국제학생처 유리문, 잔디, 도서관 계단
— 물건: 명함, 엽서 묶음, 블라인드 줄 그림자
표를 쓰고 나니, 마음속의 표도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정리는,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의식. 나는 공책의 여백에 작은 문장을 더했다.
— 여백 = 돌아오라고 남겨 둔 자리.
— 오늘의 여백: 말과 말 사이, 빛과 그림자 사이.
밤이 완전히 내려오기 전에 창밖을 한 번 더 보았다. 맞은편 건물 창문 몇 개에 노란 빛이 켜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막 일을 시작하고, 어떤 사람들은 일을 끝내고,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나는 창문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을 다시 보았다. 낮보다 덜 피곤해 보였다. 목에 걸려 있던 카메라를 벗어 조심스럽게 테이블 모서리에 걸쳤다. 스트랩이 천천히 흔들리다가 멈췄다.
수정이가 보리차를 두 잔 가져왔다. 김이 얇게 올라와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지는 동안 분명히 있었다. 우리는 잔을 조용히 맞댔다. ‘딸칵.’ 아주 작은 소리. 그 작은 소리에도 방향이 있었다. 오늘의 방향은 충분했다. 충분하다는 말이 오늘의 마침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