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의 부력-5부
창틀 위로 얇게 개어 오르는 햇빛이 자리를 바꾸는 동안, 휴대폰에서 알림 소리가 울렸다. “From: Ava.” 제목은 단순했다. “Lunch time is okay.” 문장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지만 마음이 먼저 알아차렸다. 나는 손끝으로 확인 버튼을 눌렀다. 버튼이 파랗게 빛났다 꺼졌다.
“왔어?”
수정이가 물었다.
“응. 오늘 점심에 시간 괜찮대. 주소도 같이 보냈어. 택시로 20분이면 도착할 것 같아.”
“그럼 오전엔 근처 바다 한 바퀴만 돌고, 점심 전에 도착하는 루트로 가자.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오늘도 폰으로 계속 찍어 둘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컵에 커피를 조금 덜고,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한 뼘만 더 열었다. 유리와 공기 사이에서 빛이 얇아졌다. 오늘의 빛은 과하지 않았다. ‘빛은 내 편’이라는 말이 다시 한 번 목 뒤쪽에서 조용히 떠올랐다.
간단히 빵과 계란을 먹고, 사장님이 권해 준 작은 귤 몇 알을 가방에 넣었다. 떠나기 전, 어제 정리해 둔 사진 폴더를 한 번 더 열어 봤다. 이름 줄들이 가지런했다. 가지런한 줄을 보면 마음의 표면이 고르게 펴졌다. 나는 카메라 배터리를 확인하고, 스트랩 길이를 목에 맞췄다. 수정이는 보조 배터리와 마이크 어댑터를 챙겼다.
사장님의 배웅에 우리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도로를 건넜다. 수평선이 멀리 얇게 누워 있었다. 물결은 간격을 지켜가며 부서졌다. 파도 소리는 낮았고, 바람은 파도보다 조금 높았다. 나는 카메라를 들어 바다를 한 컷 찍었다. 셔터를 누르는 동안 내 호흡이 아주 얕게 멈췄다가 풀렸다. 수정이는 폰으로 짧은 클립을 남겼다. 모래 위 발자국, 바람이 스친 후의 머리카락, 멀리 지나가는 개 한 마리. 현장 멘트를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여기는 Ava에게 가기 전, 바다입니다. 엄마가 걸었을지도 모르는 길이죠. 파도는 얌전하고, 빛은 일정하고, 마음은… 조금 덜 무겁습니다.”
말을 마치자 해안가 난간의 금속이 햇빛을 한 번 더 튕겨냈다. 튕겨진 햇빛이 눈으로 들어왔다가 금세 잦아들었다. 우리는 벤치에 잠깐 앉았다. 소금 냄새가 미세하게 혀끝을 스쳤다. 오늘은 과자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택시 안의 공기는 에어컨 냄새와 고무 냄새가 섞여 있었다. 기사님은 라디오를 낮은 볼륨으로 틀어 두었다. 광고와 도로 정보가 섞여 나왔고, 간간이 기타 소리가 끼어들었다. 우리는 창밖을 보았다. 코리안 타운의 간판들은 가까이에서 보면 한국어였고, 조금만 멀어지면 색과 모양으로 남았다. 도로의 흰 점선이 일정한 속도로 뒤로 미끄러졌다.
“긴장돼?”
수정이가 물었다.
“조금. 근데 괜찮아.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면 마음은 따라오는 것 같아.”
“어른 다 됐네~”
내려야 할 곳은 생각보다 한적한 골목이었다. 낮은 담과 나무, 잔디와 포치. Ava의 주소가 적힌 메모를 다시 확인했다. 숫자들이 정확했다. 초인종을 누르기 전, 나는 목에 걸린 스트랩을 한 번 더 만졌다. 끈의 촉감이 손끝에 얇게 남았다. ‘딩동.’ 초인종이 짧게 울렸다.
문이 열렸다. 작은 체구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 길이의 갈색 머리, 차분한 눈매. 미소가 있었지만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약간 수줍은 표정으로, 그러나 단단한 호흡으로 말했다.
“Are you… Eunha?”
“Yes. I’m Eunha. Mi-jung’s daughter. And this is my friend Su-jeong”
“Welcome everyone. Please, come in.”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말끝을 길게 끌지 않았다. 우리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섰다. 집은 정돈되어 있었다. 색이 바래지 않은 카펫, 작은 책장, 창가에 놓인 선인장. 주방 쪽에서는 수프 냄새가 났다. 토마토와 바질, 조금의 후추. Ava가 손짓으로 식탁을 가리켰다.
“Lunch is simple. Tomato soup. Bread. Salad.”
“Thank you.”
내가 말했다.
“Thanks.”
수정이가 따라 말했다.
Ava는 서랍에서 그릇을 꺼냈다. 접시가 접시 위에서 내는 얇은 마찰음이 두 번, 세 번 울렸다. 그녀는 수프를 그릇에 붓고, 빵을 한두 조각씩 접시에 올렸다. 식탁 위에는 흰 냅킨과 포크, 작은 꽃무늬가 들어간 잔이 있었다. 꽃무늬는 과하지 않았다.
“Mi-jung liked this soup.”
Ava가 말했다.
“We cooked together sometimes. She said, ‘Too salty? Not enough?’ And we laughed.”
나는 웃었다. Ava도 웃었다. 웃음은 긴장을 녹였다. 숟가락이 접시를 스칠 때 나는 소리가 가볍게 겹쳤다. 수프는 적당히 뜨거웠다. 빵의 표면이 얇게 바삭했고, 속은 부드러웠다.
“First day,”
Ava가 말을 이었다.
“I saw her at the bulletin board. Orientation schedule. She stood like… this.”
Ava는 잠깐 몸을 펴고,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렸다. 눈동자를 정면으로. 단단했지만, 딱딱하지 않은 자세.
“She looked confident. Not loud. Just… sure.”
“그랬군요.”
내가 말했다.
“엄마가 그런 사람이었대요.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사진.”
Ava가 말했다.
“She had a camera. Small one. We talked.”
“Is she talking about… light?”
내가 미소를 지었다.
Ava도 미소를 지었다.
“Yes. She said… ‘The light is my friend.’ I remember.”
수정이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폰을 꺼냈다. 녹음을 켰다. Ava는 그 사실을 눈치채고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몇 가지 장면을 더 꺼냈다. 도서관 계단, 야간 산책, 비 오는 날 기숙사 복도. 둘이 함께 우비를 입고, 사진을 찍으며 웃던 이야기. Ava의 문장들은 길지 않았지만, 장면은 분명했다. 말의 간격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Sometimes, I thought she was… brave.”
Ava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She tried new things. For me too. She said, ‘Let’s try.’ So I did.”
그는 잠깐 침묵했다. 그 침묵은 무겁지 않았다. 정리된 침묵. 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때… 친해졌나요?”
Ava가 고개를 끄덕였다.
“After the first week, we were already friends.”
우리는 수프를 마저 먹고, Ava가 차를 내왔다. 작은 머그컵에서 김이 얇게 올라갔다 사라졌다. 향은 레몬과 허브였다. 잔을 내려놓을 때 ‘딸칵’ 하는 소리가 났다.
“May I ask…?”
Ava가 조심스럽게 내 눈을 보았다.
“How is she?”
나는 준비해 둔 문장을 꺼냈다. 숨을 한 번 가볍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말을 놓았다.
“엄마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식탁 위 공기가 아주 얇게 멈췄다. Ava의 눈이 커졌다가, 곧 좁아졌다. 눈꺼풀이 떨렸고, 입술이 잠깐 달랬다. 그의 손이 잔의 손잡이를 아주 살짝 더 세게 잡았다. 손등의 힘줄이 얇게 드러났다.
“I… didn’t know.”
Ava가 낮게 말했다.
“I waited. E-mails… But it stopped. I thought… She is busy.”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의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수정이는 옆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쪽으로 밀었다. Ava는 눈가를 한 번 손바닥으로 눌렀다. 길게 울지 않았다. 그 대신 숨을 고르고, 한 단어씩 꺼냈다.
“She was my friend. Good one. I am… sorry.”
“고마워요.”
내가 말했다.
“엄마를 기억해 줘서.”
우리는 잠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밖에서 자동차가 지나가며 바퀴의 낮은 소리를 남겼다. 빛이 창틀에 따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정리됐다.
“Today,”
Ava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You are coming, so I feel relieved.”
그는 미소를 아주 조금만 지었다. 나는 두 손을 포개며 말했다.
“혹시… 집 안에서 몇 장 찍어도 될까요? 엄마가 머물렀을 자리들을.”
Ava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Yes. Please.”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먼저 창 쪽. 커튼이 반쯤 열린 틈으로 빛이 들어오고, 빛의 가장자리가 식탁 모서리에서 부드럽게 꺾였다. 그 꺾임의 곡선이 예뻤다. 나는 Ava에게 창가 쪽 의자에 앉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어깨를 조금 펴고, 턱을 아주 조금 내렸다. 안경은 쓰지 않았다. 눈매가 또렷했다.
“조금만, 저쪽으로.”
나는 손바닥으로 작은 사각형을 만들며 각도를 맞췄다.
“좋아요. 그대로.”
‘찰칵.’ 셔터 소리가 방의 천장까지 다녀왔다. 나는 한 장 더 찍었다. 웃음 직전의 표정. 그 다음은 그녀의 손. 잔을 쥔 오른손의 손가락 관절, 손등의 옅은 주름, 손톱 옆의 작은 흠집. 사소한 것들이지만, 오늘의 중심을 이루는 조각들. 수정이는 옆에서 폰으로 넓은 샷을 남겼다. 방의 배치, 빛의 흐름, 두세 걸음의 여백.
Ava는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왔다. 필름 통이 몇 개 들어 있는 상자였다. 통들 위에 파란 고무줄이 한 번 감겨 있었다.
“She gave me this.”
Ava가 말했다.
“Empty films. We kept… coins, buttons… small things.”
상자 안에는 동전과 단추, 이름 모를 열쇠 하나, 작은 버튼 배지, 찢긴 티켓 조각이 들어 있었다. 나는 상자 위에서 한 장을 찍었다. 빛이 동전 위에서 잔잔히 흔들렸다. 금속의 색이 따뜻했다. 상자는 시간이 붙잡아 둔 것 같았다.
“혹시… 이 중 하나를 제가 사진으로 남겨도 될까요?”
내가 물었다.
“Take a photo, yes.”
Ava가 고개를 끄덕였다.
“If you want a small thing… you can take this.”
그는 작은 버튼 배지를 꺼내 내 손에 올렸다. 바탕이 파란색이고, 가운데에 하얀 글씨로 짧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Be kind.” 단순한 문장이었다. 나는 그 단순함이 마음에 들었다.
“고마워요. 전시할 때… 한쪽 모서리에 놓아둬도 될까요?”
“Of course.”
우리는 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Ava는 설거지를 시작했고, 나는 그녀의 움직임을 조금 뒤에서 바라보았다. 접시와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물줄기가 스테인리스 싱크를 따라 원을 그렸다. 수정이는 그 장면을 아주 짧게 찍었다. 손의 동선, 물의 선, 소리의 길이. 모든 선이 가늘었다.
“미정은… 사람 말을 잘 들었어요.”
Ava가 설거지를 하면서 말했다.
“Listening. Not just waiting to talk. She… listened.”
“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배우는 중이에요.”
“Also.”
Ava가 덧붙였다.
“She encouraged me. To speak. My voice.”
그는 손을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그 움직임마저도 조용했다. 우리는 거실로 돌아왔다. Ava가 작은 앨범을 꺼냈다. 네 컷씩 들어가는 포켓 앨범. 여백이 많았다. 여백은 앨범의 속도였다. 사진들 사이에는 손글씨가 조금씩 붙어 있었다. “First rain”, “Night walk”, “Library steps”. 영어로 적힌 짧은 단어들. ‘사람 없는 사진에도 사람이 있다’는 엄마의 문장이 내 장기 기억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이거… 스캔해도 될까요?”
내가 물었다.
“Sure.”
우리는 프린터 옆에 앉았다. 스캔 광이 사진 위를 천천히 지나갔다. “우우—” 하는 모터 소리가 뒤를 받쳤다. 이미지가 화면에 떠오르는 순간, Ava가 작게 웃었다.
“She loved… small lights.”
“Me too.”
내가 말했다.
“작은 빛을 좋아해요. 큰 빛은 눈이 아픈데, 작은 빛은 오래 봐도 괜찮아요.”
Ava가 고개를 끄덕였다.
“Yes. That’s right.”
스캔 파일들을 USB에 담는 동안, 수정이는 테이블 위에 우리가 오늘 찍은 사진 중 한 장을 띄워 놓았다. Ava가 창가에서 앉아 있는 사진. 빛이 그의 광대뼈 아래에 작은 그림자를 만들고, 눈동자를 또렷하게 지탱했다. Ava가 조용히 말했다.
“I like this one.”
“전시회에서… ‘사람’ 섹션의 초반에 두면 좋겠다.”
내가 말했다.
“제목은 한 단어로. ‘기억’ 혹은…”
Ava가 생각하듯 눈을 내리깔았다가 올렸다.
“Patience.”
나는 웃었다.
“좋은데요? ‘Patience.’ 기다림. 혹은 견디는 시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작은 미소를 나눴다. 그 사이로 시간이 아주 얇게 흘렀다. Ava는 차를 한 번 더 내왔다. 이번엔 허브 티였다. 잔 표면의 열이 손바닥으로 옮겨갔다. 손바닥을 통해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시 목 쪽으로. 온기가 길을 만들었다.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국에 돌아가서, 조만간 전시회를 열 거예요. 엄마의 기일 즈음으로.”
Ava가 고개를 끄덕였다.
“Tell me. I want to see. Maybe… I can visit. With my son.”
그는 입술 옆을 잠깐 올렸다. 그 웃음은 첫 인사 때보다 조금 더 길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어 마지막으로 여권 사진처럼 정면을 한 번 찍고 싶다고 했다. Ava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잡았다. 배경은 거실 벽. 너무 번잡하지 않았다. 나는 숨을 반만 들이쉬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고마워요,”
내가 말했다.
“오늘 정말 많이 받았고 고마웠습니다.”
Ava가 고개를 저었다.
“I am… thankful.”
우리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신발을 신기 전, 나는 문 앞, 파란 페인트의 질감을 한 장 찍었다. 페인트의 미세한 균열, 모서리의 닳음, 손잡이의 금속. 사람-장소-물건. 오늘의 세 번째 줄.
“Before you go,”
Ava가 말했다.
“Take this.”
그는 작은 봉투를 내게 건넸다. 봉투 안에는 엽서 두 장과, 뒷면에 적힌 짧은 문장 하나. “For Mi-jung’s daughter.” 글씨가 작고 반듯했다.
“고마워요.” 나는 봉투를 가슴 가까이 넣었다.
“See you.”
Ava가 말했다. 말했다기보다는 아주 천천히 보냈다. 그 말의 끝은 짧았다. 여백이 뒤따라 왔다.
우리가 신발끈을 묶는 동안, 현관 안쪽에서 공기가 한 번 바뀌었다. 나무 바닥이 아주 작게 삐걱거렸다. 그리고,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딩동.’ Ava가 잠깐 눈을 깜박였다.
“My son is coming.”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He finishes work now.”
문이 열렸다. 먼저 바깥 공기가 얇게 스며들고, 그다음 낮은 남자 목소리.
“Mom?”
형광 조끼 끝이 보였고, 네임 태그가 반짝였다. 손에는 검은 카메라. 스트랩은 손목에 느슨하게 걸려 있었다. Ava가 미소를 지었다.
“My son, Tom.”
그가 우리를 보더니, 잠깐 멈춰 서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톰이에요. 한국어… 조금 해요.”
모음이 살짝 길었다. 그러나 뜻은 분명했다. 수정이가 눈을 동그랗게 했다.
“한국어 잘하시네요?”
그는 손바닥을 휘젓듯 내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조금만요. 회사에… 한국인 동료 있어요. 공항에서 같이 일해요. 점심 때… ‘김밥이요?’ ‘불고기요?’ 이런 말… 배우고, 드라마로… 연습해요. 손님… 한국분 오면, ‘보딩 패스 여기요’ 이런 거… 말해요. 그래서… 조금.”
마지막 단어에서 어깨가 쑥 내려갔다. 스스로도 쑥스러운 듯.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잘하시는데요.”
수정이가 맞장구쳤다.
“발음 예뻐요. 동료분 영향이 정말 크네요.”
그가 가볍게 웃었다.
“그… 민수. 제 친구. 매일 ‘발음, 발음’… 말해요.”
그때야 비로소 내 눈이 그의 손목으로 갔다. 카메라. 익숙한 그립, 셔터 다이얼의 각도, 바디의 질감. 심장이 아주 짧게 멈췄다가 한 번 세게 뛰었다. 나는 숨을 정리했다. 들숨 하나—날숨 둘—아주 짧은 멈춤.
“저… 혹시 그 카메라…”
한국어로 시작했다가, 자연스레 영어를 덧붙였다.
“I’m sorry, but… is that… yours?”
톰의 시선이 내 목의 스트랩을 스쳤다가 카메라로 돌아왔다. 그는 렌즈 캡을 벗기고 바디를 뒤집었다. 내가 손짓으로 가리켰다. 바디 아랫면, 금속판. 각인.
“시리얼 넘버 한번 확인해봐도 될까요?”
“혹시 당신 카메라인가요?”
그가 조심스럽게 한국어로 물었다. 금속판이 빛을 한 번 받았다. 숫자와 알파벳의 배열. 나는 몸을 더 숙였다. 눈앞에서 숫자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았다. 톰이 내 얼굴을 봤다.
“맞아요…?”
그의 한국어가 어눌하게, 그러나 정확하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맞아요.”
빛이 각인 사이를 얇게 지나갔다. 방 안 공기가 미세하게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