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
어렸을 때 나는 키위를 먹지 못했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히 키위를 못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식탁에 깎아 놓은 키위 한 조각을 집어 먹으면 몸에서 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키위가 닿았던 입술과 그 주변에 가려움증이 생겼다. 가끔씩 입 주변이 간질간질하며 부어오르기도 했다. 입 안을 긁을 수 없어 혀로 입천장을 몇 번이나 비비댔다. 심한 증상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불편하고 거슬렸다. 어린 내가 증상 탓에 투덜거리고 있으니 엄마는 “키위 알레르기 있는 거 아니야?” 하고는 먹지 말라며 키위를 치웠다. 엄마에게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나는 키위를 멀리했다. 냉장고 안에 있는 키위를 보기만 해도 입 주변이 간지러운 듯했다. 급식으로 키위가 나오면 키위 알레르기가 있다는 말과 함께 앞에 앉은 친구에게 키위를 넘겨주었다. 키위를 마주칠 때마다 내가 가진 알레르기의 존재를 주위에 알려야했다. 키위 알레르기가 있다고 믿었던 나에게 흔한 일이었다.
내게 알레르기 증상을 일으키는 것은 키위 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꽃가루와 집 먼지 알레르기 때문에 만성 비염 증세를 달고 살았다. 키위를 먹으면 나타나는 증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간절기에는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콧물로 인해 재채기를 멈출 수 없었다. 코를 풀기 위해 두루마리 휴지를 한 롤씩 써서 코가 헐어있기 일쑤였다. 눈치 없이 흐르는 콧물이 나를 곤란하게 만든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지어온 약을 먹으면 조금이나마 잠잠해서 매 끼니마다 약을 챙겨먹었다. 한의원도 다녀 보았지만 효과는 잠깐이었다. 비염으로 불편한 일상이 지겹다 못해 익숙해질 쯤에 큰 대학병원을 가기로 했다.
대학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내 콧속을 유심히 살펴보셨다. 이어 내 코의 상태와 처방 받을 약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셨다. 이전과 다른 약을 처방해주신다는 말에 증상이 호전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막 일어나려던 찰나에 의사 선생님이 질문을 던졌다. “혹시 알레르기 검사 받아본 적 있니?”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알레르기 검사를 받아본 기억은 없었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걸 알고 있으니 받아보지 않았을까요?” 내 대답을 들은 의사 선생님은 알레르기 검사를 한번 받아보기를 권하셨다. 간단한 검사지만 무슨 알레르기가 있는지 한번에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피를 뽑는 게 조금 무서웠지만 내가 얼마나 다양한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모르고 있던 알레르기가 발견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 병원에 다시 들렀다. 의사 선생님은 간단히 내 상태를 확인하시고 저번에 한 알레르기 검사 결과를 알려주셨다. 건네 받은 결과지에는 다양한 종류의 알레르기 검사 종목들이 주욱 늘어져 있었고 그 이름 옆에 알레르기의 여부가 적혀 있었다. 몇십 가지 알레르기 중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집먼지와 진드기, 그리고 송진가루였다. 송진가루는 의외의 결과였다. 신기해서 검사 결과지를 살펴보는데 문득 키위가 떠올랐다. 먹을 때마다 나를 괴롭히던 키위. 검사지에서 키위를 찾아보았다. 결과는 음성. 나에게는 키위 알레르기가 없었다. 의아한 마음에 의사 선생님께 키위 얘기를 꺼냈다. “제가 키위 알레르기 가 있는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이어 키위를 먹으면 나에게 생기는 증상을 줄줄이 늘어 놓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웃으며 대답하셨다. “결과지에 나온 것처럼 키위에 알레르기는 없어 보이네. 이따금씩 단 과일을 먹으면 입 주변이 간지럽거나 붓는 경우가 있어. 보통 시간이 지나면 금방 가라앉으니까 걱정 말고.”
15년을 조금 넘는 인생 동안 나를 왕왕 괴롭히던 키위 알레르기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니. 내가 키위를 먹을 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즈음부터 나는 키위를 먹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복수라도 하듯 털복숭이 키위를 흐르는 물에 있는 힘껏 씻어냈다. 계란만한 키위의 몸통을 칼로 텅텅 잘라 그 속을 숟가락으로 한 움큼 파내면 입 안이 가득 찼다. 새콤함에 혀끝이 찌릿했다. 더 이상 지레 겁먹고 키위를 피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이전에 나타났던 증상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충분히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증상이 나타날 때도 잦았다. 그렇지만 의사 선생님의 말처럼 증상은 시간이 지나면 금방 가라앉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간만에 키위를 씻어 먹었다. 곧이어 나는 입술이 눈에 띠게 부었다. 짜증날 정도로 부어있는 입술을 어서 가라앉히고 싶었다. 내버려두면 금새 가라앉을 테지만 당장 부어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웠다. 거슬리는 간지러움을 참는 것도 고역이었다. 빨리 완화시키고 싶은 마음에 증상을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비슷한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얼음으로 찜질을 한다느니, 따뜻한 물로 씻어본다느니 하는 각자의 파해법을 소개했다. 시답지 않은 정보들 사이에서 우연히 알레르기와 관련된 논문 하나를 발견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알레르기는 무조건 타고나는 것이 아니고, 성인이 된 뒤 생기기도 한다.’ 논문은 알레르기 반응이 음성으로 나왔던 사람이더라도, 그 증상이 심하면 알레르기가 새로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예시로 다양한 과일이 잔뜩 나열되어 있었다. 그 중 유독 키위라는 단어가 크게 보였다. 갑자기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논문에 따르면 지금 내게 키위 알레르기가 생겼음을 충분히 의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까 먹은 키위를 배에서 도로 꺼내고 싶었다. 내 몸에 더 심한 증상이 나타날까 염려되었다.
이후, 키위를 예전처럼 피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키위에 조심스러워졌다. 혹시 먹을 일이 있더라도 조금이라도 간지러운 낌새가 보이면 그 즉시 먹는 걸 그만두었다. 몇 년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와 키위의 관계는 도로 껄끄러워졌다. 키위와 나의 역사는 꽤나 파란만장 했다. 돌이켜보면 이처럼 기복이 심한 관계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한 번도 키위 알레르기를 겪어보지 않았다. 이 사실을 곱씹어 보니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내 몸은 키위 알레르기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키위를 대하는 내 마음가짐은 계속해서 달라졌다. 있지도 않은 키위 알레르기가 있다고 믿을 때는 키위를 마냥 해로운 음식이라고 여겼다. 작은 증상만 나타나도 괜히 온몸이 가려운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자 키위는 언제 나쁜 적이 있었냐는 듯 평범한 과일이 되었다. 간혹 증상이 나타나도 무신경했다. 그런데 갑작스런 증세를 완화하기 위해 찾은 논문이 나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다시 키위 알레르기를 걱정하였고 또 한 번 키위를 의심 섞인 눈초리로 보았다.
결국 키위의 해로움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알레르기 또한 내 마음에 달려 있었다. 논문의 내용처럼 키위 알레르기를 의심해볼 수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의심’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사실 키위가 나에게 전혀 해롭지 않다는 것이다. 키위탓에 입 주변이 부어오르는 것은 더 이상 나에게 큰 걱정거리가 아니다. 위험하다 믿었던 키위가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어떤 일은 정말로 마음먹기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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