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준
밤늦게 술 약속이 있어서 저녁을 조금만 먹은 날이었다. 늦을 것 같다는 친구의 문자 메시지를 불 꺼진 방 안에서 보고 있었다. 이미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바람이나 쐬려고 방을 나섰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우주는 그걸 허락해 준답니다!' 졸업 강연을 하는 유명 인사가 화면 쪽을 바라보고 웃는다. 나도 따라서 웃었다. 저 사람과 내가 웃는 이유는 분명 다르겠지만,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 똑같은 미소를 짓는다. 겉모습만 같은 미소임에도 우리는 같은 '사람' 취급을 받는다. 미소의 이유가 다른 만큼 미소가 주는 동질감이 크게 느껴졌다. 왜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서만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까. 내게는 하고 싶은 일이 없고 그에게는 있기 때문일까?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얼른 대답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났다. 약속에 늦을 일이 없는데도 서두르다가 신발을 구겨 신었다.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나는 급하지 않다.'고 되뇌어본다. 괜찮다, 괜찮다고.
미래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다. 어쩌면 '뭐든 되지 않을까.' 하는 배부른 착각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로 평온한 동시에 절망적인 생각이다. 뭐라도 상관없다는 식의 체념은 얼마나 한심한가. 재미있게 한 일이 많았는데, 그리고 분명 좋아하는 일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까먹어버렸다. ……까먹었는지, 이제 와서 내 흥미가 의심스럽게 보이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승산이 없다고 계산해버린 건지 모르겠다. 결국 '모르겠다.'에 닿는 고민일 뿐이다. 쌓아둔 게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까먹지 않고 잘 지킨 사람만이 미래를 낙관할 수 있다. 나처럼 입에 풀칠할 걱정만 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오늘처럼 친구랑 술이나 한 잔 마실 수 있으면 된다. 이 사소한 일상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어떤 미래를 갖던지 상관 없다.
술자리에서 만난 친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에게선 빛이 난다고 했다. 나도 빛이 나고 싶었다. 그러나 너도, 나도 빛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시시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면서 빛이 나길 바라는 건 오만이다. 졸업을 앞두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교직이수를 마치면 사립 고등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겠지. 만약 너무 늦어지고 안 될 것 같으면 공무원 준비를 할 거야. 너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공무원 준비를 하지 않을까.' 정도로 둘러댔던 기억이 났다.
친구는 지금까지도 초등학교 시절의 꿈을 갖고 있다. 그러니 언젠가 빛이 날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고 싶은 일을 잊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능성이 있다. 그래야 침착하게 희망을 구체화할 수 있다.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만이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너는 조급해보이지 않았다. 마치 언젠가는 꼭 될 것처럼 말했다. 네 앞에서 말하지 못했지만, 네가 꼭 빛이 나길 바랐다. 바쁜 척하며 살려고 스스로를 속여 가면서 글을 쓰는 누구처럼,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는지 의심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적어도 너 만큼은, 누군가가 네 미래 계획을 물었을 때, 풀칠하면서 살겠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랐다. 집에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아까보다 빨라졌다. '나는 급하지 않다.'고 다시 되뇌어본다. 괜찮다, 괜찮아. 나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풀칠이 먼저다. 내 사람들과 도란도란 술을 마시며 웃는 일상을 지키고 싶다. 평범한 노력을 기울여서 평범하게 살겠다. 열정에 잡하먹혀 자기 몸을 태우고 빛이 나는 인생은 분명 동경할 만하지만 그렇게 살 자신도 없고 능력도 없다. 내가 지키고 싶어 하는 술자리가 나로 하여금 꿈에 대해 고민하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술자리는 내 꿈을 포기한 자리다. 이제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꿈을 이뤄낸 멋진 미래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목구멍에 부어버리려고 하는 건 시간의 냄비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 형태를 잃어버린 내 꿈이다. 오늘 술자리에서 안주로 삼아서 전부 삼켜버렸다.
가정 경제 상황도 좋지 않다. 술자리에서 쓴 돈만 10만 원이다. 알바는커녕 우리 가족 빵집 일 하면서 내 시간 따로 내기도 힘겨웠다. 꿈 쫓아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다. 꿈을 단박에 결심할 정도로 대단한 재능도 없다. 그러나 꿈을 찾고 싶어서 무던히 노력했다. 맨땅에 헤딩을 하기도 했고, 영어로 된 책을 사서 꾸역꾸역 읽기도 했다.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바둑, 작곡, 사물놀이, 보컬, 작문, 교육. 아쉽게도 의심을 피해간 시도는 없었다. 어느 것도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 같지 않았다. 태평하게 꿈 타령 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기약 없이 찾아다닐 수도 없다. 뭔가를 더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많았다. 25살이다. 내 배고픔을 스스로 책임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고 나니, 풀칠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얽히고설킨 풀들이 서로 달라붙어서 내 목이 꿈을 이야기할 수 없더라도, 풀을 삼켜야 한다.
네가 웃어서 따라 웃었다. 너는 꿈을 이루겠노라는 희망으로 웃었다. 나는 체념한 마음을 모른척하고 웃었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웃겼다. 술자리 핑계를 대면서 꿈의 탐색을 포기하는 내 모습이 우스웠다. 가정 환경이 마뜩잖아서 공무원을 준비하겠다고 말하는 내가 참 ‘대단해보였다.’ 꿈 같은 건 난 모르겠다. 꿈 팔아 술자리에 나가는 내가 창피해 미치겠다. 술이나 마시자, 친구야. 꿈이 뭐 대수냐. 너처럼 웃었는데 남들 눈에 우리의 미소가 같아 보일런지 모르겠다.
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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