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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Vol 3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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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콰드로페니아 Feb 18. 2021

집보다 편한 곳이 필요해

승준.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이 늘었다. 나는 혼자 머물러 있는 시간을 훌륭하게 가꾸지 못했다. 2월부터 5월까지 하루 종일 뉴스와 기사만 찾아보며 언제쯤에야 코로나19 치료제가 나올지, 매일 몇 명의 확진자가 나오고 있는지 빠짐없이 알고자 했다. 아버지는 매일 가게에서 장사를 하셨고 어머니는 집에서 쉬며 병세를 회복 중이셨다.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코로나19에 걸리게 된다면 큰 위기가 닥쳐올 것이 분명했다. 뉴스와 기사에서 끊임없이 코로나19의 무시무시한 전파력을 강조했기 때문에 잠깐의 외출에도 극도로 민감하고 예민해졌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 유지되면서 ‘내가 혹시라도 바이러스를 밖에서 묻혀오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은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출처가 불분명한 음모론까지 접하면서 불안감은 심해졌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댓글에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내 심리적 부담감과 공포심도 덩달아 커져만 갔다.


이 시기 동안 밖에 나갈 일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나를 외부로 이끌어준 일정 중 하나는 콰드로페니아 회의였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었던 기간을 제외하고, 우리는 늘 행궁동의 한 카페에서 회의를 했다. 오전 11시, 오픈 시간에 맞춰 가면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다. 이 카페를 찾는 특별한 이유는 바로 2층의 4인 테이블. 널찍한 테이블에 앉아서 노트북을 펼치면 회의하기에 제격인 분위기가 조성된다. 매주 팀이 나가야 할 방향과 각자 쓰고 있는 글에 대한 대화와 앞으로 맞이하게 될 변화와 방향을 정리했다. 3월 13일 목요일도 마찬가지였다. 회의 중 여러 이야기가 복잡하게 오고가다가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주장들은 서로 부딪히거나 아귀가 맞지 않아서 매끄럽게 대화가 갈무리되지 않았다. 잠시 다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2층 높이에서 바라본 창문 너머로, 나뭇잎들도 후두둑 비를 맞고 있었다.


머리를 식히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혼자서 끙끙 앓았던 마음이 편해졌다. 코로나19에 대한 잡념도 들지 않았고, 타인과의 대화가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도와서 음모론 따위가 내 머릿속에서 설치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면, ‘바이러스가 마스크를 모두 무력화시키고 그 사이를 지나 호흡기로 온다’는 추측성 정보가 있었다. 친구 중 한 명은 ‘그 논리가 맞았으면, 마스크만 쓰고 다니는 병원 사람들은 모두 감염되어야 했는데?’ 라고 명쾌하게 답하며 내 좁은 시야를 깨주었다. 몇번 더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고 나는 타인과의 대화에서 불안감을 많이 덜어낼 수 있었다. 집에서는 해소하지 못했던 걱정과 불안이 많이 완화되었다.


잠깐의 대화를 마친 후, 남은 회의를 마무리하는 동안에는 코로나19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우리는 앞으로의 일들에 걸려있는 희미한 기대감을 지키고 싶었다. 열심히 시작한 이 일을 잘 해내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다.. 그 기대감과 사명감을 어떻게 지킬지, 구체적으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를 논의하다보니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회의의 태풍이 가져다주는 정신없음이 좋았다. 집에서 혼자 있을 때 느꼈던 불안감이나 공포, 불편함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잠깐이었지만 친구들과 있는 그 공간은 집보다 더 편한 느낌을 주었다.


집은 걱정과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아늑하고 편한 곳이다. 그러나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혼자만의 걱정과 불안은 집에서 무럭무럭 커졌다. 집은 도리어 나를 괴롭히는 장소처럼 여겨졌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방에 들어오기만 하면 코로나 19와 이와 관련된 온갖 추측성 정보들로 인한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집이 편하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누군가와 길게 대화할 기회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아버지가 가게에서 일할 때, 나는 집에 있었고 내가 가게에서 일할 땐 아버지가 집에서 쉬셨다. 어머니도 병세를 회복 중이셔서 대화를 힘겨워 하셨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나는 내 방에서 혼자만의 불안감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밖에 있으면 코로나19에 걸릴 확률이 더 높아지는데도, 마음이 오히려 편하다는 점이다. 몸이 가장 ‘안전한’ 곳은 집이 될 수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평소 같았다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금방 털어내버릴 문제도 외출이 제한되는 상황에서는 속에 남아서 곪아버렸다. 집보다 편한 곳이 필요하다는 내 목소리는 어쩌면 ‘몸은 집에 있어도 대화할 사람이 필요해’로 들릴 수도 있다. 이전까지는 집에서 가족과 나누는 대화의 소중함을 몰랐었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대화할 사람이 집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어느새 익숙해진 나를 보고 있으면 새삼 놀랍다. 아무렇지 않게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마스크를 버리고 비누로 손을 씻었다. 산책로에는 이전보다 사람이 많아졌다. 답답한 시기를 지나 외출한 사람들은 소중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만 혼자 괴로웠던 것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일 확진자 수가 눈에 띄게 감소하면서부터 외출이 조금씩 편해졌다. 그만큼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과 만남이 많아졌고 불안감을 많이 덜어낼 수 있었다.


집에서 가족과 나누었던 소소한 대화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많았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길을 걷던 기억도 나고, 마스크에 걸리적거리지 않게 길거리 음식도 사먹었던 장면도 떠오른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던 순간에서 느꼈던 아늑함과 즐거움은 그만큼 소중했다. 아직은 마스크 너머로 건네는 인사와 대화로 만족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결국 집보다 편한 곳은 없었다. 집에서 괴로웠던 내가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바람일 뿐이었다. 타인과의 대화로 마음의 평화를 차차 되찾아온다면, 내 몸과 마음이 편히 쉴 수 있었던 예전의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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