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는 나를 오랜 기간 괴롭혔다. 오이소박이, 오이무침, 오이냉국, 피클까지. 오이로 만든 음식은 늘 피하고 싶다. 이상야릇한 냄새, 물기를 가득 머금어서 씹으면 입 안에 퍼지는 찝찝함, 요상하게 생긴 속내까지, 어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도 자주 봐서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식탁에서 만나는 오이는 여전히 달갑지 않다. 시간이 흐른 탓인지 오이를 봐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줄은 알지만 먹지 않는다. 내 젓가락은 오이 위를 살짝 스쳐서 김치를 집는다.
오이를 싫어하는 데는 다 사연이 있다. 찝찝한 오이 냄새보다 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었다. 내 초등학교는 급식실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점심 시간이면 급식을 담은 차가 반마다 하나씩 왔고, 그날마다 정해진 당번이 급식을 나눠 줬다. 급식을 받으면 각자 자리에 앉아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었다.
나는 그날 나온 오이무침을 먹고 토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먹었는데 이내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입안을 가득 채웠고,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이럴 때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억지로 삼키거나, 뱉거나, 심하면 토한다. 쓸데 없이 오기가 강한 나는 그걸 기어이 억지로 버티며 먹으려고 애를 썼다. 결과는 뻔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곳은 교실이었다. 내가 토하는 모습을 모두가 보았고, 선생님은 나를 화장실로 보내고 책상을 치우셨다. 나는 정수기에서 물을 마시며 속을 식혔다. 그러나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에게는 너무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잔향은 강렬했다. 10 여 년이 넘게 오이를 볼 때마다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싫어하는 오이 냄새를 받아 들일 수 있게 되었음에도 기억은 구역질처럼 올라와서 내 입을 막고 오이를 저 멀리 밀어냈다. 그래서 여름날 아빠가 좋아하는 오이냉국이 보이면 기겁하며 멀리 떨어져 있을 때가 많았다.
오이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 놓았지만 오이 말고도 싫어하는 대상은 많다. 내가 오이를 싫어하듯이 사람은 저마다 무언가를 싫어한다. 물론 모든 것을 좋아하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순간에 그런 방식으로 살 수는 없다. 무언가를 싫어할 때 얻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싫다는 마음이 생존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을 때도,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원동력이 될 때도 있다.
다만 우리는 책임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품은 감정,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말과 행동은 여럿에게 영향을 미친다. 내가 싫어하는 오이를 생각하면 공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따져 보면 꽤나 익숙한 예시이다. 가끔씩 오이를 좋아하는 엄마와 밥상머리에서 실랑이를 벌이곤 한다. 당신이 열심히 만든 오이 반찬을 한입도 먹지 않으냐고 물으며 서로 옥신각신한다. 내 이야기만 보면 그저 지나가는 순간 중 하나로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나처럼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공간을 만든다면 말은 달라진다. 실제로 페이스북에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만들어졌고 소소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처럼 나와 엄마 사이의 실랑이 같은 개인의 상황만 고려하면 작지만, 모이고 모이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크기까지 이를 수 있다.
특히 싫어하는 대상이 직접적으로 사람을 향하면 그 책임은 더욱 커진다. 싫어하는 마음을 담은 말과 행동은 누군가 마음 속에, 쉬이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별 생각 없이 연예인에게 슬쩍 남긴 악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밀어내기 위해 뱉은 퉁명스러운 말 한 마디.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조심하지 않는다면, 서로 안의 쌓인 상처는 서로를 조금씩 밀어내게 될 것이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선생님은 국어 시간에 한 주제를 두고 학생들과 다 같이 토론을 하곤 하셨다. 그날 주제는 동성애 찬반이었다. 학생들은 주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부분 주제에 반대했다. 누군가는 종교적 이유를 언급했고, 다른 누군가는 해당 사안이 미칠 사회적 영향을 지적하며 반대했다. 싫은 게 당연하다며 손사래를 치는 이도 있었다. 찬성은 극히 적었는데, 그 사람이 내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괜찮다는 방향이었다. 선생님은 찬성 측에 서서 강하게 항변했지만, 토론은 상당히 일방적으로 흘렀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어떤 사람의 존재에 대해 찬반을 나눌 수 있는지도 의아하지만, 그보다 교실 안 그 누구도 자신의 말이 향하는 대상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상대가 어떤 마음일지 돌아보려 하는 사람은 없었다. 토론이 점점 더 깊어질수록 자신이 얼마나 대상을 싫어하는지 드러낼 뿐이었다. 토론에 참여했던 학생 중 자신이 던진 말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 돌멩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몇 명이나 있었을까. 던진 말에 대한 책임감은 자리를 비우고, 토론의 승부와 거친 감정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거나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는 종교적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쓴 글은 아니다. 누구든 무언가를 싫어할 수 있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리고 내가 오이를 싫어하는 것처럼 저마다 싫어하는 것에 대해 그럴싸한 이유를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유가 말 한 마디의 무게를 대신할 수 없다. 말은 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 흩어지겠지만 흔적은 어딘가 늘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싫다는 말이 지금보다 조금 더 무거웠으면 좋겠다. 책임은 무겁고 어렵다. 그러나 무책임하게 던진 말 한 마디는 더 무겁고 아프다.
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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