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퀀트대디 Nov 02. 2023

질서보다는 혼돈을 예찬할 것

"저희 회사는 아무런 시스템도 갖춰져 있지 않아서 뭔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여기보다는 조금 더 체계가 있고 배울 수 있는 회사에 다니고 싶어요."


흔히 들을 수 있는 퀀트 주니어들의 푸념이다. 

시스템이 없고 체계가 없기에 학교에 다닐 때처럼 무언가 잘 짜여진 커리큘럼,

즉 어떤 질서가 갖춰진 환경을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사실 체계가 있다는 말은 당신이 언제든 쉽게 대체될 수 있다는 말과 동치다. 그런 태도는 한마디로 부품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차별성이 없는 상태에서 공식이 있고 매뉴얼이 있으니 해당 유닛을 갈아끼우는 것은 녹슨 부품을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또한 체계를 원한다는 말은 자기에게 주어진 그 한정된 역할, 그것만을 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문성을 키우려는 시도, 그건 좋다. 문제는 그것이 장기적으로 족쇄가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우리가 흔히 IB라고 부르는 외국계 투자은행에 계신 임원분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그들은 절대 자신의 전문 분야, 속된 말로 자신의 나와바리에서만 잘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회사는 결국 경영자의 관점에서 여러 방면에 두루 경험과 실력이 있는 사람을 고위 임원에 앉히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력 분야가 아니더라도 거기에 밸류가 있다면 기꺼이 시도해봐야 한다. 어떤 포지션에 있던 결국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


결국 계속해서 자신의 커리어 패스를 발전시켜 나가려면 처음에는 좁고 깊은 방향으로 시작했을지언정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저변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체계가 없는 조직에서 일을 하는 것을 내 성장의 폭발력을 키워줄 수 있는 하늘이 주신 기회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굉장한 기회라고 받아들이고 도전적이고 진취적으로 프로젝트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환경이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일지라도 개척자 정신을 가지고 외부에 의존하기보다는 없다면 스스로 만들어내겠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한다.


5년 전 나는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팀을 만들었다. 허허벌판의 맨땅에서 시작했음은 당연하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낯설었다. 어쨌든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처음부터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수밖에. 이른바 'ZERO TO HERO' 프로젝트였다. 파생상품을 평가할 수 없다고? 우리가 내부용 프라이서를 만들자! 데이터베이스가 없다고?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자! 자동 매매체결 엔진이 없다고? 만들자, 엔진! 전략들과 리서치 자료들을 저장할 필요가 있겠네? 전략 아카이브를 만들자! 이렇게 필요한 지식을 새롭게 습득하면서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것들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모든 걸 갖춘 곳은 없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제대로 된 퀀트 비즈니스를 논하기엔 아직 그 역사가 매우 짧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환경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황은 자신의 실력을 키울 절호의 기회가 될 뿐만 아니라, 남들이 섣불리 도전하지 못하는 매우 척박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DNA는 불확실성 속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가스라이팅한다. 도전을 꺼리며 계속해서 자기합리화를 하는 광경을 주변에서는 꽤 많이 관찰할 수 있는데 이는 바로 본능이라는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본능을 이겨내고 기꺼이 불확실성 속으로 뛰어드는 걸 우리는 개척 정신이라 부른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한 번 상상해 보라. 서부로 가고자 하는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단 한 개도 없었다. 그들은 허허벌판에서 혈혈단신으로 있으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금부터라도 내가 새롭게 만들어나가겠다는 생각, 이른바 프론티어 정신으로 무장한 채 그들의 목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나아갔던 것이다. 아무것도 없다면 오히려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게임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체계보다는 오히려 혼돈을 예찬하며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속에서 절대 대체될 수 없는 나라는 아이덴티티를 확실하게 뿌리내려야 한다. 결국 불완전한 상황이 오히려 성장의 토대로 작용한다.

작가의 이전글 실천력을 끌어올리는 분할사고와 아웃풋 법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