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편에 이어
퀀트에게는 구현을 위한 프로그래밍이 필수다 보니 알게 모르게 퀀트는 이과만의 영역이라는 오해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는 말 그대로 오해일 뿐이다. 사실 퀀트에게는 전공을 따지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퀀트의 일은 근본적으로 다학제적 관점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퀀트 업무를 하기 위해서는 금융시장과 글로벌 경제에 대학 지식, 선형대수와 미적분, 확률 통계에 대한 지식, 프로그래밍과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또한 나아가 금융시장의 발전 과정을 인류 역사의 한 부분으로 보아 그 흐름과 맥을 짚어내려는 역사학적 관점도 필요하며, 시장 참여자들의 투자 행태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심리학적 관점,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통틀어 종합적으로 이해한 뒤 의사 결정에 대한 방향성을 수립하는 다분히 철학적인 관점 또한 필요하다.
실제로 최근 전자책 독자분들을 대상으로 무료 온라인 세미나를 개최했는데 참석하신 분들의 전공을 설문해 보니 문과와 이과의 비율이 거의 반반이었다. 그만큼 사실 퀀트 지식의 나와바리(?)는 굉장히 넓은 범위에 걸쳐 펼쳐져 있다 보니 어떤 전공을 하고 있건 금융과 경제에 관심이 있고 데이터 기반의 합리적 의사 결정에 흥미를 느낀다면 퀀트에 대해 한 번쯤 알아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 사고력을 마비시켜 버리는 현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러한 다학제적 접근에서 오는 부담감이다. 다시 말해, 문과는 이과의 영역을 어려워하고 반대로 이과는 문과의 영역을 어려워한다. 특히나 이미 예전부터 맛탱이가 한참 가버린, 그래서 사일로되어 있고 파편화된 교육을 제공할 수밖에 없는 K-교육 시스템에 익숙해왔던 우리는 다른 선진국의 학생들보다 이러한 부담감이 훨씬 더 하다.
문과는 수식을 보면 멘탈이 바스러지고 이과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문외하다. 또한 입력만 하는 일방향 교육에 길들여졌기에 문과와 이과 모두 말과 글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남들 앞에만 서면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자신의 의사를 어떻게 타인에게 전달해야 할지 감을 전혀 못 잡는다. 토론과 글쓰기에 진심인 다른 국가들의 교육 환경과 비교해 보면 퀀트적 역량을 위한 토양이 매우 척박한 상태다.
이러한 현실은 퀀트에게 있어서 쥐약이다. 특히나 퀀트는 배운 지식을 실제로 써먹어야 하는, 다시 말해 실사구시의 정신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생각해 본 경험과 기회가 전무할 뿐만 아니라 여러 지식들을 결합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본 적도 없으니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부터 어려워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 자발적 하브루타가 필요한 지금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내가 추천하는 학습 방법은 바로 학회 혹은 스터디 그룹을 활용하는 것이다. 나 또한 학생 때 그리고 사회초년생이던 시절 학회 활동을 통해 금융공학에 대한 공부를 훨씬 더 다차원적이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특히나 학회라는 조직은 내가 배운 것을 나의 관점에서 소화하고 표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내가 배운 것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모이기 때문에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내가 보지 못했던 지식의 사각지대를 비출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이전까지 장님 혼자서 코끼리를 만지는 격이었다면 이런 활동을 통해 여러 장님들이 코끼리의 여러 부분을 만져보고 한곳에 모여 자신의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코끼리의 전체적인 상을 그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나 또한 상경계열 출신이었기에 수학이나 코딩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지만, 수학과나 컴공과 출신 친구들의 설명을 듣고 그들의 도움을 받고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직관적인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다. 동시에 FICC 시장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에게 내가 아는 바를 최대한 설명하면서 오히려 내 지식의 깊이가 더 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듯 학회 활동을 통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한 메타인지가 제대로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문답식 교육 방식은 이미 유대인들이 몇천 년 전부터 실천해왔던 이른바 하브루타 교육 방식이다. 서로 생각을 나누고 의견 차이가 있으면 토론함으로써 생각의 그릇을 점점 넓힐 수 있고 여러 지식 체계들을 통합함으로써 문과는 이과적으로 또 이과는 문과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된다. 문리대학이 없어져 버린 현실에 대해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스스로의 리케이온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내 앞에 있는 문제를 기꺼이 돌파해나가려는 진정한 퀀트 마인드셋의 발현이다.
# 점점 퇴색되어 가는 전공의 의미
또한 STEM 관련 학위가 퀀트 커리어 경력을 위한 필수 요건이라는 믿음과는 달리 최근에는 채용 관행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아직까지도 여러 회사들은 여전히 직무 요건에 STEM 학위를 명시하고는 있지만 조금씩 그 트렌드는 변해가고 있다. 왜냐하면 점점 특정 학력보다 기술 역량 테스트를 우선시하는 회사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기술의 발달로 이제 채용 과정에서 기술 역량에 대한 즉각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보니 회사의 입장에선 코딩을 제대로 못하는 컴공 출신도 있는 반면 코딩을 정말 기똥차게 잘하는 철학과 학생 또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퀀트 분야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 때 배운 전공 하나로 평생 먹고산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이제 점점 퇴색되게 될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기술 접근성의 향상을 야기하기에 이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다방면의 영역들을 계속해서 통합시켜 나가고 있다. 나는 문과라서 이걸 못하고, 혹은 나는 이과라서 저걸 못한다는 구시대적 사고는 결국 퇴행을 자초하는 길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