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물었다.
“00이 기억나?” 하마터면 웃을뻔 했다. 기억하다마다. ‘너랑 관련된 건 하나도 안 잊어버렸어.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 잊었나본데 기억력은 내가 너보다 훨씬 좋았어.’ 하지만 더 많이 기억하는 쪽이 약자인 것만 같아서 “아, 00이 기억하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좋아했던 사람의 한마디 한마디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했다. 녹화된 비디오를 틀어 놓은 것 같이 머릿속에서 재생이 됐다. 큐시트로 적어둔 것처럼 그 사람의 표정, 행동, 목소리가 차례대로 생각났다. 저장해 두고 심심할 때마다 꺼내어 재생했다. 잊을까 두려운 만큼 영원히 기억하게 될까 두려웠다.
기억에도 용량이 있고, 기한이 있는 줄 모르던 때라서 그랬다. 요즘은 전에 써놓은 글을 보면서 자주 놀란다. 꼬맹이 때 생각이 지금보다 성숙해서 놀라기도 하고, 내가 이런 표현을 할 줄 알았다고? 하면서 놀라기도 하지만 남이 써놓은 일기보듯 너무 새로워서 놀랄 때가 많다. 보통은 일기가 단서가 되어 기억이 되살아 나지만 복기에 실패하고 암호같은 문장들만 남기도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친절하게 좀 더 자주 써 놓을 걸.
오늘 먹은 점심메뉴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 될 줄 몰라서 그랬다. 세월이 기억으로도 오는 줄 몰라서 그랬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한들 내가 기록한 우리의 기억과 네가 기록한 우리의 기억이 온전히 같을 수 있을까. 애초에 같은 기억이란 건 없는지도 모른다. 세월 말고도 우선순위와 가치관과 자기보호까지 달려들어 기억을 조종하지 못해 안달이니까.
#예감은틀리지않는다 를 읽고
#목요일의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