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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콩콩 Mar 08. 2018

김밥의 미래

잘 말아줘~ 잘 눌러줘~

지난해, 일주일에 적어도 한번 많으면 서너 번 정도 김밥을 먹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밥을 해먹기엔 너무 늦었다. 식당에 들어가 무얼 먹기에도 부담스러운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대충 때우기는 싫었다. 그럴 때 김밥보다 좋은 음식이 없었다. 간단하지만 갖춰진, 구하기 쉽고 가격도 저렴하지만 든든하고, 심지어 맛있는 김밥. 이렇게 자주 먹어도 물리지 않는 너란 김밥. 아아. 누구였을까. 맨 처음 이들을 함께 싸먹을 줄 알았던 그는. 김밥을 자주 먹고 있다는 걸 인식한 그날, 김밥이 나의 2017 올해의 음식으로 선정될 것임을 직감했다.


김밥은 웬만하면 실패가 적다. (불행히도 편의점 김밥은 늘 실패하지만) 어느 김밥집이든 그 맛이 중간은 한다. 반대로 말하면 맛집이 도드라지기 힘든 음식이기도 하다. 비슷비슷한 재료로 남들과 구분되는 맛을 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좋은 재료를 쓰면 맛이야 더 좋아지겠지만 김밥에는 기대 가격이 있다. 프리미엄을 표방한 몇몇 브랜드가 있긴 하지만 여전히 ‘고급’과 ‘김밥’은 거리가 멀다. 아무리 적어도 들어가는 재료가 김과 밥을 포함해 5가지 이상. 조금만 생각해도 이렇게 쌀 수가 없는 음식이다. 하지만 김밥은 짜장면이 5천원을 넘어 6~7천원이 되기까지 여전히 평균 3천원을 넘지 않는 음식으로 남아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심지어 김밥을 만든다는 의미의 동사까지 ‘싸다’다. (소오름!)


김밥이 2017 올해의 음식으로 선정되기까지 곡절이 좀 있었다. 사실 김밥은 내가 싫어하는 음식이었다. 여섯 살 즈음 김밥을 먹고 멀미를 심하게 해서 트라우마가 생겼다. 처음 몇 년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대중적이라 먹을 기회가 늘 널려 있었다. 김밥을 한 두 개씩 먹을 때도 있었지만 소풍에는 가져가지 않았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 때는 열이면 열이 모두 김밥을 싸던 시절이라 불우한(?) 친구로 오해 받기도 했다. 평소에는 친구들이 싸온 김밥은 먹기도 했기 때문인데 이상하게도 소풍 김밥은 먹을 수 없었고, 그걸 설명하기가 조금 복잡했다. 원인이 김밥용 햄, 그것도 뜨끈한 전세버스에서 2~3시간쯤 삭은 햄 냄새였다는 걸 아주 늦게 알았다. 그걸 깨닫고 고2 소풍에 처음으로 김밥 도시락을 가져갔다. 햄 대신 양념 소고기와 개운한 깻잎을 넣은 김밥이었다. 그날 엄마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정성 들여 김밥을 싸셨다. 얼핏 기억하기에도 속재료만 7~8가지가 넘는 꽉 찬 김밥이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까지 꼬박 십 년이 걸렸다.


가끔 김밥을 못 먹던 시절이 떠올랐을 뿐 별 생각 없이 십 몇 년을 살았다. 그러다 2017년에 김밥을 자주 먹기 시작하며 취향이 확고히 섰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이왕 먹는 김밥 좀 맛있는 걸 먹어볼까 싶어서 보이는 김밥집마다 들어가기를 여러 차례, 허나 입에 맛는 집이 없었다. 실패를 거듭하던 어느 날 연희김밥을 만났고, 회사 근처 김가네 제육김밥을 발견했으며, 김말자 꼬마김밥과 조우했다. 그리고 밝혀진 나의 취향. 소시지나 햄이 들어간 김밥은 싫어하고, 대신 메인 재료에 간이 좀 배어있는 걸 좋아한다. 연희김밥에는 햄을 넣은 메뉴가 아예 없고(장조림김밥과 꼬마오징어김밥을 드세요 여러분. 꼭 드세요. 두 번 드세요.), 제육김밥은 제육이 햄을 대신하며, 김말자 꼬마김밥의 속도 낙지젓, 진미채, 멸치, 불닭 등이 메인이다.

좌 연희김밥-장조림 / 우 김가네-제육


해가 바뀌어서도 여전히 김밥을 자주 먹는다. 자주 먹는 것뿐만 아니라 좀 특별한 음식이 됐다. 김밥이 바란 적도 없는데 내가 굳이 올해의 음식으로까지 지정했으니 그 책임을 다해야 될 것 같기도 하고 더 맛있는 김밥이 없나 끊임없이 개발을 해야하나 싶기도 하다.


나 어린 시절만 해도 김밥은 소풍 때나 먹을 수 있던 별식이었다. (이런 말을 하니 엄청 옛날 사람같다) 언제든 싸게 먹을 수 있는 흔한 음식이 되었다가 다시 별별 재료가 다 들어가는 별식으로 돌아온 것을 보니 김밥의 미래가 궁금하기까지 하다.


김밥 트라우마가 발현되고 극복한 뒤 올해의 음식으로 지정되기까지 근 30년이 걸렸다. 그리고 이제 내 취향의 발견을 넘어 김밥에게 뭐라도 되고 싶은 지경이 되었다. 참 오래살고 볼 일이다.


+ 꼭 소개하고 싶은 김밥들

망원동 보물섬 김밥 – 김치김밥. 식당 김치, 특히나 저렴한 식당의 김치를 믿지 않는다. 김밥보다 더 흔하지만 구색이나 맞출 뿐 김치가 메인인 음식에서 조차 중국산 김치를 쓰는 일도 잦으니까. 그런데 보물섬 김밥 너는 도덕책…

좌 보물섬김밥-김치 / 우 종로김밥숙대점-마참


종로김밥 숙대점 - 마요네즈참치김밥. 숙대생들은 누구도 “마요네즈참치김밥 주세요.” 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마참주세요.” (아직도 그런지는 확인을 못해봤다) “참치김밥 주세요.” 라고 하면 안된다. 이곳의 마참은 참치와 엄연히 구별된 존재다. 친구들과 나는 가끔 마참과 라기(라볶이)를 먹기 위해 숙대앞으로 찾아간다. 프랜차이즈라고 해서 똑같은 맛이 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걸 종로김밥 숙대점에서 배웠다.  




브런치에서 이 글이 많은 관심을 받아 읽은 사람이 4만 명이 넘어갔다. 기쁜 마음으로 <김밥의 미래>라는 책을 만들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에서

>> 책 <김밥의 미래> 탄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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