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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콩콩 Feb 11. 2018

옷장이 망가졌다

“우지끈”

정말 딱 이 소리였다. 설거지를 하려고 막 고무장갑을 꼈는데 방 한편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올 것이 왔구나.’ 보지 않고도 소리의 진원지를 알아차렸다. 옷장이었다.


옷장(나이 미상)은 말하자면 입주 옵션이었다. 내가 이사하기 전전 세입자의 것으로 아직 쓸 만한 것 같지만 필요없다면 버려주겠다던 물건이었다. 독립 전까지 평생을 주어진 공간에서만 살아 인테리어 취향이 미천했던 나는 이사 스트레스에 여드름이 창궐한 상태였다. 선택하고 결정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가구 선택이 가장 힘들었다. 예산 비중도 컸고, 한 번 집에 들이면 쉽게 바꿀 수 없는 까닭이었다.


독립할 집을 알아보며 깨달은 내 첫번째 취향은 ‘옷이 바깥에 나와있는 걸 싫어한다.’ 였다. 그래서 옷장은 꼭 사기로 마음 먹었다. 먼저 침대를 고르고 그에 맞춰 옷장을 고르려고 했는데 침대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사이즈, 프레임, 매트리스에 침구까지 결정의 연속이었고, 몇 주째 구매는 커녕 장바구니에도 못 담고 있었다. 그러다 전 세입자가 이미 이사를 나갔다기에 공간을 가늠하러 빈집에 왔다가 놓여있던 옷장을 보고는 그냥 쓰기로 했다. 쓸 만했고, 공짜였으며, 무엇보다 고르지 않아도 됐다.  


옷장은 약간 짙은 미색이었다. ‘취향 없음’을 화이트로 메우려고 했던 내 계획에 어긋났지만 짐짓 모른 척 했다. 미색은 쌀색이란 뜻이고, 쌀은 흰 쌀밥이 되니까 이 정도면 얼추 화이트 계열 아닌가.

옷장을 그려보았다.

이사를 하고 보니 옷장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위쪽에는 손님용 침구가 들어갈 정도의 선반이 있었고 그 아래로 양쪽으로 공간이 나뉘어 옷을 걸 수 있는 봉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긴 옷을 걸어도 바닥에 끌리지 않는 높이라 원피스나 코트가 많은 내게 딱 맞았다. 그 아래로는 문을 여닫을 수 있는 서랍이 한 칸 있어 양말과 속옷을 넣기 좋았다. 그닥 크지 않은 옷장 하나에 많은 것이 들어갔다. 옷을 걸고 남는 아래쪽 공간에는 티셔츠와 운동복 등을 개어 넣었고, 몇 안되는 모자는 옷장 문에 붙은 간이 고리에 걸었다. 옷장은 다리미와 스카프까지 다 받아주었다. 점점 옷장이 좋아졌다.


첫번째 위기는 서랍으로 왔다. 양말을 꺼내려고 서랍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는데 서랍이 열리는 대신 문만 딸려왔다. 서랍 몸체와 맞물렸던 부분이 빠진 것이다. 몸체와 문의 이를 잘 맞춰 넣었는데 문이 고정되지 않았다. 다시 보니 몸체 양옆과 바닥까지 세 면이 모두 문과 맞물려야 하는 구조였다. 세 면을 다 맞춰 끼워보았는데도 계속 실패했다. 왜 이러나 싶어 서랍 몸체를 꺼내 뒤집으니 바닥을 지지하던 나무가 부러져 있었다. 힘을 못받아서 바닥이 밑으로 내려 앉으니 문에 있는 홈에 끼워지지가 않는 것 같았다. 임시방편으로 서랍을 가볍게 비웠다. 어설프지만 겨우 문이 서랍몸체에 고정되었다.

문의 뒷모습을 그려보았다

이후로 서랍을 열 때마다 힘이 갑자기 문으로 쏠리지 않게 조심했다. 몇 달 정도는 잘 썼다. 그래서 조심히 열어야 하는 걸 잊기도 했다. 방심한 날이면 문이 또 떨어져 나왔다. 점점 분리 주기가 짧아졌다. 그리고 작년 말 완전히 분리되어 다시는 합칠 수 없었다. 서랍은 입을 벌린 채 담고 있는 물건을 다 내보였다. 문짝은 버리지도 숨기지도 못했다. 벽에 기대어진 모습이 눈에 걸릴 때마다 마음이 어수선했다.


생각이 날 때마다 옷장을 검색했다. 아직 쓸 수는 있었지만 보기가 싫었다. 그러다가 우지끈 사태가 벌어졌다.


옷장 왼쪽 봉은 철제였으나 오른쪽 봉은 각목이었다. 한눈에 오른쪽 봉에 문제가 있었고, 그래서 각목을 봉 길이로 잘라 대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오래된 일이었는지 나무가 약간 U자로 휘어있었다. 무게를 더 많이 받았다가는 부러질 것 같았다. 가벼운 옷을 조금만 걸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안일해졌다. 나는 계속 쇼핑을 해댔고, 오른쪽 봉에 걸린 옷은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결국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두 동강난 오른쪽 봉


하필 옷장 문을 꽉 닫지 않았었다. 봉에 걸려있던 옷이 아무렇게나 쏟아져 정리할 엄두가 안났다. 겨우 스스로를 달랬다. 겨울이라 방안에 들어와 있는 건조대에 구겨지면 안될 옷을 우선 걸고, 접어도 될 만한 것들은 개어서 옷장 안에 넣고 몇 년 째 손을 안댄 옷은 버렸다. 나머지 옷은 바닥 한쪽에 차곡차곡 쌓았다. 이 많은 옷이 걸려 있었는데 이제까지 버틴게 용했다.




옷장을 검색한다. 여전히 가구는 어렵다. 금액도 천차만별이고 천장 높이부터 배송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 많다.


옷장보다 먼저 줄자를 사야겠구나. 맞다. 이 집엔 엘리베이터가 없지. 나는 왜 4층에 사는 걸까. 헐? 사다리차를 불러야 한다니. 배송료가 옷장값만큼 나오겠네. 이 옷장은 왜 키가 작지? 이 옷장은 왜 이렇게 좁아? 서랍말고 선반이 있는 게 나을까? 어 이거 괜찮다. 오~ 슬라이딩 옷장 좋아 보이는데. 헉! 이거 비싸네... 윽! 이 브랜드는 빼자. 이럴게 아니라 우선 줄자를 사자. 줄자는 어디에서 사지? 다이소에 있겠지 뭐. 아까 집에 올 때 사올 걸. 어? 이거 괜찮다. 아! 아까 본 거네. 그리고 무한반복.


옷장이 망가졌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데도 속도가 안난다. 과연 나는 새 옷장을 언제쯤 들여놓게 될까. 아무래도 ‘빠른 시일 내’는 아닐 것 같다. (그나저나 지금 옷장은 어떻게 버려?)

뭐 이렇게 생겼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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