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척추동물에게 바침
오래된 통증
이 정도면 최근에 생긴 통증은 아니라는 의사의 말에 그 시작을 가늠하다가 깜짝 놀랐다. 10년, 어쩌면 12년 쯤 된 통증이었다. 처음에는 교통사고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후유증인가 싶었다가 나중에는 불편한 책상 때문에 잠시 악화된 줄 알았던 통증. 그리고 하루에 12시간 넘게 책상 앞에 앉아 있으니 안 아픈게 이상한 거라고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이 정도 쯤은 아프다고 믿어온 게 근 10년이었다. 그러다가 앉으나 서나 걸으나 멈추나 ‘와씨 이거 뭐 이렇게 어떻게 해도 아파!’ 한 것이 이제 고작 며칠인데 그 사이에 생각이 엄청 많아졌다.
몸의 호소
척추를 중심으로 내 몸의 왼쪽 오른쪽을 아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왼쪽과 오른쪽은 누구나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뭐랄까. 왼쪽의 존재감이 특히나 뚜렷하달까? 시끄럽달까? 허리가 '아이고 허리야.' 하면 엉덩이가 '엉덩이 죽겠네.' 하고, 다리가 '다리 저려.' 하면 팔이 '나도나도!' 하듯이 하루종일 콕콕쿡쿡저릿저릿이다. 특히 걷거나 서면서 왼쪽발에 체중이 실릴 때면 왼쪽발 날이 '아이고 무거워.'하고 내 몸무게를 원망한다. (쳇, 그렇게까지 무거운 건 아니라고...) 반면에 오른쪽은 마치 없는 것처럼 조용하다. 건강은 이렇게 조용하고 존재감이 없는거였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왼쪽이 말한다. '야, 아파아파 아프다고!'
디스크라니 이건 너무 식상하잖아.
여러 짐작을 돌고 돌아 결국 디스크가 확정적이라고 하자, 여럿이 말을 보탰다. 이곳은 셋이 모이면 그 중에 하나는 허리통증을 겪는 도시다. 그러다 보니 각자 좋다고 생각하는 치료 방법이나 운동이 다 다르다. 다만 사람 건강 가지고 장난치는 병원이 많으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는 한결 같다. 그러고 보니 허리 아프다는 사람은 많은데 완쾌되었다는 사람은 못봤다. 누군가 허리 디스크라고 하면 '저런, 얼마나 아플까!' 라고 상상만 했을 뿐인데 이렇게나 지속적이고 생생한 통증인 줄 미처 몰랐다. 하루종일 몸이 자기가 아프다고 호소해대는 통에 그쪽으로 소모되는 에너지가 상당한 모양이다. 며칠 째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잠이 들었다 통증에 깨기를 반복하고 있다. 아픈데다가 피곤하기까지 하니 짜증의 끓는점도 매우 낮아졌다. 엑셀 수식이 잘 안 먹혔을 때와 목걸이 줄이 꼬여서 풀리지 않았을 때 짜증으로 큰 일을 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주 위험한 순간이었다. 디스크가 이렇게 생활 전반을 휘젖는 질병이었다니. 그래도 그렇지 디스크라니 너무 식상 하지 않은가.
이게 다 사피엔스 때문이야.
목요일에 글쓰기를 하려는데 허리가 너무 아파서 앉아서 자판을 두드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앉아서 쓰다가 다시 누워서 허리를 좀 폈다가 다시 일어나서 기지개를 펴기를 반복하다가 iPhone에 있는 음성자판 기능을 생각해 내었다. 내가 사피엔스라서 이렇게 고도로 발달 된 기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내가 사피엔스라서 이족보행을 하는 바람에 다른 척추동물에 비해 디스크의 위험이 크다면 이건 매우 불행한 일이다. 내가 얼마나 아픈가 하면 그러니까 그 아주 오랜 옛날 이족보행을 발명해 낸 그 유인원이 원망스러울만큼 아프다.
사람은 허리가 생명이라더니
성인 여드름으로 긴 시간 고통 받았을 때 얼굴에 여드름 나는 것만 아니라면 정말 다른거는 다 괜찮다고 생각하곤 했다. 적어도 나의 고통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는 않을테니까. 그런데 역시 사람은 제가 가진 고통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존재인가 보다. '허리가 생명이다.' 같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며 허리만 안 아팠으면 싶다. 차라리 골절이나 맹장염 같이 회복 방법이나 기간이 정해진 고통이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이래놓고 막상 어디 한 군데 부러지면 허리 아플 땐 그래도 움직일 수는 있었어 하고 이 때를 그리워 하겠지.
아파서 좋은 점을 찾아보자.
누군지도 모르는 이족보행 발명가를 원망한다거나 골절이나 맹장염을 부러워한다고 해서 통증이 없어지지 않으니 좀 더 발전적인 생각을 해보도록 한다. 이를 테면 통증의 장점. 먼저 다른 사람들의 자세를 관찰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누가 어떻게 앉아있는지 별 관심이 없었다. 이번 기회로 현대 사무직들의 자세는 정말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번째는 생각을 많이 하게되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가만히 누워서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왜 이렇게 아프게 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는지, 나은 후에 다시 안 아플 방법은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사피엔스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허리통증으로 인류의 기원을 생각해 볼 수 있다니! 놀라워라.
앉는 법, 서는 법, 걷는 법
아직 디스크 확진 전이지만 대략적인 나의 치료계획은 이렇다. 우선 믿을 만한 병원을 찾는다. 치료를 받으며 필라테스를 한다. 꾸준히 그렇게 한다. 일말의 통증도 남지 않을 때까지. 아마도 오랜 시간이 걸릴테지만 멈추지 않기로 한다. 앉으나 걸으나 심지어 누워서도 아픈 몸을 보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비뚤게 앉아 왔는지, 짝다리를 어찌나 짚어 댔는지 어렴풋이 알게됐다. 기억은 안 나지만 태어나 혼자 앉기까지 6개월, 서는데 11개월, 걷는 데 12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다시 앉는 법 부터 서고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면 그 보다 더 걸리면 걸렸지 더 빠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아는 데도 이 착잡함은 어떡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아직 젊은 이때 치료에 대한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그리고 남은 생을 개운한 몸으로 살아가야지. 오늘 밤에도 통증이 바람에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