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 이야기
1. 사이공에 온 이유
밴쿠버에 갔던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한국에서 더 잘 살고 싶어서 사이공에 왔다. 물론 사이공은 밴쿠버 때와는 달랐다. 어학연수는 며칠 사이에 결정했으나 실은 회사에서 보낸 3년 반의 시간이 어학연수로 자연스럽게 나를 끌고 간 셈이었다. 사이공행은 훨씬 빨랐다. 나는 일단 급하니까 (숙고하기엔 경쟁자가 많았다.) 손을 먼저 들고 다음에 이유를 생각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유. 사이공에 가면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니까 기회가 정말 많을 거야! 브랜드의 아주 처음의 일, 네이밍같은 것도 할 수 있겠지! 정말 새롭겠군.
새로운 일은 정말 많다. “새로운 경험”은 고민 없이 손 든 게 조금 쑥스러워서 급하게 만들어낸 이유였는데 와서 보니 진짜 새로운 일들이 비처럼 내린다.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전수(?) 체화되었던 우리 브랜드를 객관적이고 명확한 언어로 정리당해봄도 처음이요, 우리가 합의한 브랜드의 핵심이 이곳의 말과 문자를 입고 태어나는 모습도 처음 본다. 팀을 이끄는 일도 처음이거니와 그 팀원들의 상당수가 다른 나라 사람인 것도 물론 처음이다. 영어로 회의를 하고, 문서를 만들고, 메일을 쓰는 것도 새롭고 서비스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정말 많은 결정이 필요하다는 것도 새롭다. 배너는 몇 종이나 노출시킬지, 일별로 관리할지, 시간대별로 관리할지, 쿠폰 발행은 모든 마케터가 할지, 한 두 사람만 담당하게 할지, 담당자의 권한은 어느 정도인지, 프로모션은 어느 시점에 누구에게까지 전달해야 할지 등등 한국이었으면 나 이전에 누군가가 결정해서 따르고 있을 항목들이 나와 우리 팀을 거쳐 끝난다는 사실에 정신이 바짝 든다. 이 시간을 잘 보내면 우리는 훌쩍 클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한국에서 더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겠지.
2. 사이공의 좋은 점
베트남 어때? 힘들지 않아?
물론 힘들다. 하지만 베트남이라서 힘들까? 베트남이라 힘든 부분은 서울이었다면 다른 모습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밴쿠버로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사이공에 올 때도 별 기대가 없었다. 걱정도 없었다. 이직을 하는 것도, 직능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 사람도 일도 다 거기서 거기겠지 뭐. 과연 사이공의 일도 일이었다. 어디든 쉬운 시장이 없고, 집과 가족을 떠나 모르던 나라에서 일하는데 이 정도는 힘들지 안 힘들겠나.
그래서 사이공 진짜 좋아?
좋은 건 좋고, 나쁜 건 나쁘다. 어디나 그렇듯이. 물론 사이공이라서 좋은 점이 있다. 베트남이 아니라 사이공이 좋다고 말하는 이유는 반토막난 한반도의 내게 베트남은 너무 긴 세상이라 내가 겪은 사이공으로 범위를 좁히는 편이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사이공은 살기 좋다고 할 수 없지만 나쁘지는 않다.
치안은 괜찮은 편이다. 제법 늦게까지 여자 혼자 돌아다닐 수 있는 도시다. (외국인을 노리는 좀도둑이 좀 있다. 지난 6개월 동안 한국 팀원 세 명이 아이폰을 소매치기당했고, 또 다른 두 명이 지갑을 잃어버렸다.) 사이공에 사는 한인이 15만 명이 넘고, 계속 느는 추세다. 사이공이 살기 나쁘지 않다는 증거다. 내가 출석하는 한인교회에 한 주도 빠짐없이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온다. 주재원도 제법 있지만 50~60대 정도로 보이는 분들이 더 많다. 대부분 이주를 준비 중이라고 소개한다. 은퇴 이민지로 베트남이 인기를 얻는 모양이다. 주변국과 비교하자면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안전하다는 것, 그리고 경제 성장 가능성이 높은 점 등이 이민지로써 베트남의 매력일 것이다.
무시할 수 없는 사이공의 장점은 물가다.
특히 음식이 싸다. 이 값에 누리는 맛이라 하기에는 황송할 만큼 훌륭하다. 진한 국물의 쌀국수는 2천 원. 직화로 고기를 구워 소스와 함께 얇은 쌀국수 면과 채소를 곁들여 먹는 분짜는 2천5백 원. 코코넛 껍질을 그릇 삼아 방금 긁어낸 코코넛 과육을 토핑으로 얹어주는 아이스크림은 750원. 한 모금 마시면 정신이 바짝 드는 커피반 연유반 카페쓰어다가 600원. 쌀이 들어가 바삭한 바게트에 미트 스프레드를 바르고 채소와 즉석 달걀프라이를 넣은 반미는 550원. 입안에서 육즙과 함께 녹아내리는 얼굴만 한 립아이 스테이크는 3만 5천 원. 4가지 레시피로 조리되는 랍스터와 그에 어울리는 와인을 제한 없이 먹을 수 있는 5성급 호텔 뷔페는 7만 원. 사이공에서 베트남 음식을 한국의 1/3~1/4 가격으로 즐기고 있다. 스테이크나 파스타 같은 서양식도 한국의 1/2 수준으로 꽤 괜찮은 요리를 맛볼 수 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까닭인지 대체적으로 서양식은 한국보다 사이공이 낫다.
주변 국가와 도시로 여행 가기 편하다.
비행기로 1~3시간 거리에 유명한 여행지가 많다. 지난 6개월 동안 베트남 국내 여행지만 세 곳을 다녀왔다. 아담한 사막(사실은 사구)이 인상적인 무이네, 일 년 내내 20도 안팎의 온화한 날씨가 매력적인 커피 산지 달랏, 동양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냐짱은 모두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좋았다. 3월에는 두 시간을 날아 싱가포르에 갔는데 ‘인공미도 이쯤 되면 예술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주말을 틈타 대만, 홍콩, 방콕, 쿠알라룸푸르 등을 다녀왔다. 내가 서울에 있었다면 한 달에 한 번 옆 나라로 떠날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잔고가 늘었다.
체류비 등으로 벌이는 좀 늘고, 씀씀이는 줄어서 그렇다. 물욕 대마왕이라 한때는 매일매일 뭔가를 샀다. 돈이 없으면 머리끈이나 양말이라도 샀다. 원피스 마니아 선언 이후에는 죄책감 없이 한 달에도 여러 벌 원피스를 사들였다. 그런 내가 사이공에서 뭘 안 산다. 짐이 늘어나는 것을 경계하는 마음도 있지만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많이 못 만나서 그렇다. 안 사니까 사고 싶은 마음이 줄었다. 원래 원피스를 사면 그에 어울리는 샌들을 사고 그에 어울리는 가방도 한 점 하고, 그 착장에 잘 맞는 립스틱도 사고 사는 김에 마스카라도 같이 사는 건데 마중 쇼핑이 불발되니 잔고에 별일이 없다. 퇴근 후 약속도 당연 줄고, 물가도 한국에 비해 저렴하니 이러다가 나 부자 되는 거 아니야? (설마...)
싱가포르 정도를 제외하면 동남아 물가는 어딜 가도 한국보다는 낮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어느 나라에 있더라도 1~3시간 거리에 다른 나라가 있고, 그게 어디였다 하더라도 내게 한국만큼 쇼핑하기 좋은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3. 한국이 좋아서
결국 내가 느낀 사이공의 좋은 점 대부분은 한국 돈에서 온다. 한국 회사에서 한국의 내 계좌로 꽂아주는 월급을 받으며 이곳의 물가로 살고 있으니까. 주재원 신분으로 회사에서 지원해 준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까. 이곳의 생활이 영원하지 않으니까. 내게는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한국이 좋아서 그래서 사이공이 좋은 거다. (친절하고 역동적인 사이공 사람들은 잠시 논외로 한다.)
너 언제까지 사이공에 있어?
모른다. 올해까지? 되도록 빨리 가능한 때를 만나 돌아가고 싶다. 마케팅에 관한 두루두루의 경험이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임이 분명하지만 베트남 마케팅 전문가가 되려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한국에서 더 잘하는 마케터가 되려고, 그렇게 한국에서 더 잘 살려고 굳이 굳이 3,600km를 날아왔다.
“이미 마음이 떴네요.”
올해 말쯤 돌아가면 적당하겠다고 하니 사이공에 터를 잡은 사람이 말했다. 영원히 여기 있을 생각을 해야지만 마음이 붙어있는 걸까? 나는 이곳이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게 (써놓고 보니 지금은 내가 있어야 돌아간다는 의미가 되어버렸다. 사실과 다르다.) 만들어 놓고 이제 가도 좋겠다 싶을 때를 2019년 말로 정하고 달려가고 있다. 때로 끝은 시작보다 더 좋은 동기가 된다.
한국이 왜 좋아요?
아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 말로 해야 알 것 같아서 말로 하자니 한국이 좋은 이유가 좀 쪼들리다. 좋아하는 음식들을 언제든 먹을 수 있어서 (연희김밥과 교촌레드콤보와 이화수 육개장이 먹고 싶습니다. 선생님) 나에게 잘 맞는 원피스가 많아서, ‘사뿐’ 샌들을 신어보고 살 수 있어서, K뷰티가 짱이니까, ‘아는 형님’을 본방으로 보려고, 편하고 깨끗한 지하철이 있으니까, 해질녘 한강을 보며 퇴근하려고, ‘테일러 커피’ 쿠폰을 두 번만 더 찍으면 되어서, 아니면 치킨은 살 안 쪄요 살은 내가 쪄요’에 같이 웃을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어쩌면 이 모두는 다 핑계고 사실은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리고 너랑 놀고 싶어서, 그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으니까 그렇다. 얼른 성공해서 한국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