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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콩콩 Mar 30. 2019

한국이 좋아서 (上)

밴쿠버 시절의 이야기

어학연수 시절의 일이다.
세상에 이민을 원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좀 늦깎이 연수생이라 어학연수 중인 학생들보다는 영주권을 준비중인 사람들과 나이대가 비슷했는데 그들은 이제 곧 돌아가야하는 나의 처지를 조금은 짠하게 생각하는 거 같았다.

이제 한국 가면 다시 엄청 치열하게 살아야겠구나.

(불쌍해서 어쩌나.)
한국은 (이곳과 다르게) 너무 경쟁이 심하지 않느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비인간적인) 한국으로 돌아가다니 (정말 안됐다.)
어학연수 왔다가 너무 좋아서 그냥 눌러 앉는 사람이 많은데 (넌 정말 갈거니?)
저기 (무려 시민권자인) 저 남자는 어떠니? (결혼하면 너도 영주권 생기는데...)

류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에 앞서서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 멀리까지 떠나온 걸 보면 한국살이가 녹록한 것은 아니었나보다 라는 짐작이 있었다. 파혼이라든지 해고, 못해도 건강의 이상신호 같은 결정적인 사유를 내게 기대했던 것 같다. 일종의 도피로 캐나다행를 택했고 캐나다의 훌륭함(?)을 알아버렸으니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라는 짐작.

결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캐나다에 간 분명한 이유 하나는 다니던 회사였다. 보통 일이 힘들면 사람은 괜찮거나 사람이 힘들면 일이 괜찮거나 둘 다 아니라면 보수라도 괜찮거나 한다던데 그 회사는 그 셋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 영역에 있었다. 일은 월급에 반비례하여 많고, 책임감은 경력에 반비례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많았고, 일이 힘든 만큼 경험의 밀도가 높았다. 그런 회사가 미우면서도 좋았다. 평균 근속이 2년이 안되던 곳에서 3년을 넘게 버텼는데도 이직할 엄두가 나지 않던 어느날이었다. 나는 이 애증의 회사에 들어올 수 밖에 없었던 애초의 이유를 돌아봤다.

영어. 영어였다.
나는 책임감 있는 소수의 주니어가 베짱이 선배들을 업어 키우는 회사의 구조나 갑질이 만연화된 한국사회를 탓하기 전에 영어를 탓했다. 정확히는 영어를 못하는 나를 탓했다.  

그러니까 캐나다에 간 결정적 사유는 "영어못함. 그래서 잘하고 싶음.” 이었다. 나는 나의 문제를 영어실력부족으로 정의했고 문제를 풀기 위한 여러 방법 중에 연수를 택한 것 뿐이었다. 미국이나 영국, 호주의 여러 도시가 있었지만 어학연수지로 밴쿠버만큼 적절한 곳이 없다라는 유학원의 추천을 수용한 결과였다.

그건 "한국을 떠나기위해서”보다는 "한국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한국에서 더 잘 살고 싶어서 캐나다에 갔다.



밴쿠버는 훌륭했다.
캐나다가 아니라 밴쿠버가 훌륭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반도의 내게 캐나다는 너무너무 큰 세상이라 내가 겪은 밴쿠버로 범위를 좁히는 게 좀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캐나다는 기대보다 정말 훌륭했다. 사실 애초에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계였으나 들뜨거나 두렵지 않았다. '다 거기서 거기. 사람 사는데지.' 했고 과연 밴쿠버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다르면서도 제법 같았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혜진아 밴쿠버 어때? 거기 정말 좋지? 너 너무 좋아서 안 오는 거 아냐? 너 어쩐지 안 올 거 같아.” 라고 말했다. 물론이었다. 밴쿠버는 정말 좋았다. 그런데 있는 돈 쓰면서 하고 싶은 공부하고 여가 시간도 충분하다면 그곳이 어디든 이만큼은 좋으리라 생각했다. 서울이든 밴쿠버든 더블린이든 그 어디든 이렇게 살면 모두가 이 정도는 좋겠지. 안 좋겠어?

물론 밴쿠버라서 특히 더 좋았던 점도 많다.
일년의 절반이 우기이고, 우기가 끝나면 해가 높이높이 떠서 밤 10시까지 환한 밴쿠버에서는 나무들이 잘 자랐다. 가로수만해도 몇백 년 된 나무들 같이 컸고, 집 앞 공원만 가도 국립수목원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사람도 적고, 공장도 적어서 공기가 맑고, 하늘은 파아랗고 높았다.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뜬 달은 볼 때마다 신기했다. 횡단보도에 서서 달려오던 차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자면 차들은 하나같이 속도를 늦추고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 어느 거리든 어느 대중교통이든 휠체어와 유모차를 쉽게 만났다. 주인과 함께 산책 중인 사자만한 개들을 자주 마주쳤는데 누구 하나 짖지 않았다. 종종 50m 길이 풀과 5m 높이의 다이빙보드가 있는 집근처 커뮤니티센터로 수영을 갔다. 학교를 마치고 해변 산책도 자주 갔다. 15분 거리에 뉴욕 센트럴파크도 부럽지 않다던 스탠리 공원이 있었고 우편엔 태평양을 좌편엔 북아메리카를 두고 공원을 거닐었다. 그도 아닌 날엔 한적한 카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오후 3시의 햇빛을 쬐었다. 행복하다는 말은 종종 육성으로 터져 나왔다.

홈스테이 내방에서 찍은 바깥풍경
집에서 30초 거리 공원
20-30분만 버스를 타고 나가면 하이킹 할곳이 지천이었다.


밴쿠버에 조금 더 머물고 싶기도 했다.
내가 부모님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거나, 스물여섯이나 스물일곱이었다거나, 통장 잔고가 조금 더 여유있었다면 나는 그 시점에 돌아오지 않았을 수는 있다. 영어가 원어민만큼 편해졌다면 밴쿠버에서 직업을 찾았을 지도 모른다. 편하게 돈 쓰며 공부하다가 남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는 삶에서 매일 출근하며 남의 돈을 받아야 하는 삶으로 돌아오기가 마냥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행복을 알아버렸다.
밴쿠버의 시간을 지나며 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았고, 이만큼이나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게된 이상 불행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전거 타는 법이나 수영처럼 행복도 몸으로 배우는 거니까 이렇게 몸소 배웠으니 행복이 필요한 때에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겠지. 밴쿠버든 서울이든 그게 어디든.
  
무엇보다 내가 만났던 캐나다의 복지는 남의 것이었다.
내 것이 될 수 없으니 훌륭하다한들 소용이 없었고, 가질 수 있다 한들 버려야 하는 게 너무 많았다. 한국이 그립지도 밴쿠버에서 외롭지도 않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잠시 밴쿠버에 머무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가족과 친구와 커리어가 한국에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작가될 줄로 굳게 믿고 있어서 나의 언어와 독자와 글감을 한국에 두고 다른 곳에 터전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진지했다.) 캐나다의 복지를 갖고 싶은 사람은 그곳에 남았고, 그게 내 것이 아니라고 믿은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이 어때서
한국 가기 싫지? 밴쿠버 계속 살고 싶지? 같은 질문이 불편했다. 아닌데 아닌데! 나는 한국에서 살 건데! 한국에서 잘 살려고 왔는데! 한국도 좋은데! 아니 나는 한국이 더 좋은데! 내가 부정하고, 단언해도 별로 믿는 것 같지 않았지만. 나는 그 질문들에 설득력있는 대답을 하고 싶었다. 할 수 없었지만... 그래서 굳이굳이 가족, 친구와 커리어같은 이유를 끌어왔는데 생각해보니 그럴 필요 없었다. 내가 좋은데 어쩌라고. 도대체 한국이 어때서.

하룻밤 꿈처럼 밴쿠버 시절은 잊혀져 갔다.
한국에 돌아오자 거짓말처럼 아무도 밴쿠버에 살고 싶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고 싶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이공에 오자 다시 그 질문이 시작되었다.




한국이 좋아서 (하)에서 이어집니다.



아! 문제였던 영어는 어떻게 됐냐고?… 매일매일 이런 영어에도 해외사업부로 나를 발령한 회사에 감사와 원망을 동시에 보내며 좋은 기회니까 열심히 하자, 이게 열심히한다고 될일이냐!!! 를 반복하고 있다. ‘문제를 무엇으로 규정하는가’가 이렇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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