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남자

작디작은 무용담 in 올랜도

by 손콩콩

비행기를 세 번 타고, 시차만 두 번이 바뀌면서 거의 48시간 째 깨어 있었지만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쉬는 대신 쇼핑을 하기로 했다.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는 아웃렛에서 간단하게 몇 곳만 둘러보기로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밤 10시까지 돈을 쓰고 있었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버스에 탔다. 승객은 친구와 나, 방금 다른 버스에 탔다가 다시 내린 어떤 남자 셋 뿐이었다. 약간 뒷편 앉았는데 남자는 많은 자리를 두고 우리와 가까이 앉더니 계속 쳐다봤다. 그 시선을 친구와 내가 동시에 느꼈다. 친구가 저 사람이 버스에 타기 전에도 버스비를 꺼내는 우리를 유심히 쳐다 보았다고 했다. 조금 겁이 났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서로의 소지품을 단속했다. 바닥에 내려놨던 쇼핑백을 두 손에 움켜 쥐고, 폰은 가방에 넣었다. 남자는 산만하게 자리를 옮겨 다니며 손짓을 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끌려고 애썼다.

남자의 드래드 머리를 지저분하게 늘어 뜨리고 낡은 바지를 멋대로 내려 입었다. 노선이 꽤 긴 버스였으나 집 앞에 나온 사람 마냥 빈손이었다.

남자를 보지 않는 척 하며 남자를 관찰하다가 문득 앞 버스를 탔다가 그냥 내린 이유가 우리를 타겟 삼아서 였나 싶어졌다. 그 때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두손을 모아 날 가리키며 "You, You" 하고 나를 불렀다. 그리고 "I like you." 라고 했다. 반사적으로 "No, thank you." 라고 대답했다. 남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내 심장 박동은 빨라졌다. 남자는 자리에 앉지 않고 버스를 휘젓고 다니며 틈틈이 우리를 쳐다 보았다. 경계심은 점점 공포로 변해갔다.

50시간 정도 깨어 있던 우리는 그제야 이곳이 미국이며, 마약이 흔하고, 총기가 허용된 나라라는 게 기억났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봐도 아웃렛에서 돈을 잔뜩 쓴 관광객이었다. 게다가 둘 다 환전한 모든 돈을 들고 나왔다.

정류장을 지나며 몇몇의 승객이 더 탔다. 온 신경이 그 남자에게 쏠려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버스 안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에게 뭐라고 해야 지금의 상황을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할까. 그냥 지금 내릴까. 저 사람이 따라 내리면 어떻게 하지. 그럼 다시 잘못내린 척 다시 올라타자. 경찰을 부를까. 대사관 전화번호는 뭐지. 친구와 나는 쇼핑 이야기를 하듯 지극히 평범한 말투로 지금 이 상황을 해쳐나갈 방법을 의논했다. 한국말은 못 알아 듣겠지만 표정과 말투는 전달될 것 같았다. 애써 톤을 가다듬고 사소한 농담을 하듯 말끝머리에 살짝 웃음을 담았다. 우리가 겁에 질린 걸 들켜서는 안됐다. 자신을 무서워 한다는 걸 들키는 순간 우리는 진짜 그의 먹이가 될 것 같았다.

다시, 할 수 있는 건 기도 뿐이었다.

제발 우리보다 먼저 내리게 해주세요! 우리를 안 쳐다보게 해주세요. 우리한테 무관심하게 해주세요. 제발요. 제발!!!!!

하지만 내릴 곳이 가까워질수록, 남자가 우리를 흘끗대며 자리를 이리저리 옮길 때 마다 공포는 점점 커졌다.

별별 것이 다 후회되기 시작했다. 미국에 그것도 동양인이라고는 우리 밖에 없는 동네에 여행 온 것, 늦게까지 쇼핑한 것,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하지 않은 것, 바로 앞 버스를 놓친 것 까지.

그런데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 후회를 해야하지? 내가 동양인인것도 2시까지 버스가 다니는 동네에서 10시까지 쇼핑을 한 것도 영어를 못하는 것도(이건 좀 잘못한거 같지만) 버스를 놓친 것도 잘못한 건 아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의 시선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두려웠다.

숙소를 한 정거장 남기고 한 커플이 내릴 채비를 했다. 우리도 그들을 따라 내리기로 했다. 에코백을 크로스로 메고 쇼핑백을 하나로 합쳐 들었다. 내리기 전에 만약에 그 남자가 따라 내리거든 도로 올라타자고 약속을 했다. 그 남자가 다시 따라 올라 타면 왜 따라오냐고 눈을 똑바로 보고 단호하게 말해야지. (하고 이 상황에 머리로는 영작을 하고 있는 나의 영어....) 그 다음엔 버스 안에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자. 그러는 사이 버스가 멈췄다. 빠르고 정확하고 가볍게! 숨을 참고 그 남자를 지나 정류장에 내렸다. 남자는 아직 버스에 있었다.

"건너!"

커플이 빨간불인 도로를 횡단하는 줄도 모르고 그 뒤를 따라 달렸다.

눈 앞에 보이는 드럭 스토어에 들어서자 안도가 밀려왔다. 지옥에서 탈출한 기분이었다. 버스 안은 분명 잠깐의 지옥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젤리를 사면서 웃고 있었다.

어쩌면 그 남자는 지나가는 여자에게 실 없이 농담을 날리는 찌질이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주의가 산만하고 목소리가 클 뿐 남을 헤칠만한 위인은 못 되는 그냥 조금 이상한 사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타고 있는 환한 버스 안, 아직 길거리 상점엔 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은 한가롭게 산책을 하는 시간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남자가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면? 포마드를 발라 깨끗하게 뒤로 넘긴 머리였다면? 아니 솔직히 흑인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만큼 겁에 질렸을까?

이 글을 읽고 있었다면 이제까지 어떤 모습의 남자를 상상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동양인은 아니었을 것 같다.

처음엔 '여행에서 만난 위기' 정도의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글을 쓰다보니 내가 느꼈던 두려움이 잘 전달되지 않았다. 플롯을 바꾸고, 장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해도 마찬가지 였다. 스킬의 문제도 분명 있겠으나 그보다는 상황이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이건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상상력이 만들어낸 못생긴 공포였다.

남자는 내가 가진 게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했다. 빼앗길 것이 많아 나는 두려웠다. 남자는 내가 얼마나 시시한 사람인지도 알게 했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다급한 상황이 되면 편할대로 생각해 버렸다.

시시한 나를 위한 변명도 있다. 지금까지도 나는 우리가 작은 '동양여자관광객'이 아니었다면 남자가 그런 식의 추파를 던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이 글을 마무리 한다. 여행은 늘 많은 걸 주지만 작은 무용담이 될 뻔한 이 사건은 얄팍하게나마 나를 돌아볼 시간도 주었다. 다음엔 조금 더 나은 생각을 하게 되리라 믿는다. 말처럼 쉬운 건 하나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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