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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주부 Jan 04. 2019

함께 사는 교육을 상상할 때

오픈컬리지 대안교육 프로젝트 2주차


Photo by Shane Rounce on Unsplash


오픈컬리지 대안교육 프로젝트를 참여하는 중이에요. 지난 주 목요일이 첫번째 모임이었고 어제 두번째 모임이었는데, 저는 사정상 어제 처음 참여했어요. 


간단한 자기소개를 끝내고, 각자 관심사와 처한 상황에 따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참여자 한 분이 재미있는 질문 하나를 던졌어요. "교육은, 누가, 왜 시작하게 된 걸까?" 우리는 각자 상상력을 발휘했지요. 머나먼 옛날, 신석기 시절, 아니 아니 아마도 그보다 더 먼 구석기 시절, 나이가 많은 누군가 나이가 어린 누군가를 가르쳤겠지. 과일을 따는 방법이었을 수도 있고, 흉폭한 동물들을 피하는 방법일 수도 있고. 그들이 서로 가르치고 배웠던 이유는 뭘까?


여러 이야기가 오가다, 우리는 잠정적으로 "살기 위해서"라는 생각에 도달했어요. 맞아요. 우리는 살기 위해 배우는 것일지도 몰라요. 자본주의 사회, 노동시장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하기 위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정서적으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심리학 관련 서적을 읽지요. 이처럼 사람은 살기 위해 배워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마무리 짓지 않았어요. 대신 다음으로, "누구와 함께 살고자 하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져봤어요. 함께 살고자 하는 범위. 그 범위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가족이기도 하고, 공동체이기도 하고, 어느 종교이기도 하지요. 또한, 동네이기도 하고, 특정 지역이기도 하고, 국가이기도 하고요. 각자의 범위에 따라, 우리는 사람을 가를 때도 있지요.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과, 함께 살지 않아도 되는 사람으로. 


사실 인간의 역사는 분류, 가름의 역사였을지도 몰라요. 계급을 기준으로 귀족과 평민이 나뉘었고, 인종을 기준으로 흑인, 황인, 백인이 나뉘었지요. 차별적으로 포용하고 배제하면서, 어느 사회는 발전했지만 어느 사회는 발전하지 못했어요. 이를 교육에 접목하면, "정말 좋다"라고 평가 받는 교육들, 가령 자아를 찾고 실현하는 교육, 사유하도록 이끄는 교육도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요. 누군가가 사유하고 자아를 실현할 때, 누군가는 핍박 받는 삶을 살며 사유는 커녕 생존을 위협받았지요.


우리가 도달한 잠정적 결론은, 지구적 관점에서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교육 이슈를 바라보고 상상해야 한다는 것. 나만, 우리 가족만, 한국만 살기 위한 교육은 그 울타리 너머 다른 이들의 삶을 억압, 배제하고 나아가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오늘날, 국제경제에서 도태된 국가의 사람들은 난민이라 불리며 타국을 전전하고, 치열한 경쟁 속 끝도 없이 파괴된 지구는 바다와 하늘에서 그 상처를 드러내고 있어요. 배제하는 교육은 결국 많은 이를 고통 받게 해요. 그리고 그 화살은 머지않아 누군가를 배제한 이에게 향할 지도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교육을 상상해야 할지도 몰라요. 나, 가족, 국가만 생존하는 교육이 아닌 모든 인류, 동식물까지 포용하는 교육 말이에요. 그 교육은 지금 내 삶을 꽉 채우지는 못해도, 모든 이의 삶을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하지 않을까요? 나만 살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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