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잠 (15)

by 드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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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지평선을 파랗게 물들였다. 상쾌한 바람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찰리는 좀 더 속도를 높여 도로를 질주했다. 오픈카를 운전하는 것이 처음이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찰리의 마음은 그 어느때보다 부풀어 있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픈 명희가 바로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명희씨, 춥지는 않아요?"

"아뇨, 바람이 시원해서 너무 좋은 걸요."


명희는 찰리를 바라보며 살며시 웃음지었다. 산들산들 불어 오는 봄바람에 몸을 맞긴 채 명희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찰리의 시선이 느껴졌다. 찰리는 이 시간이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랐다. 지난 1달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명희를 만났지만 사실 그녀와의 관계가 찰리의 생각만큼 수월하게 진척되지는 않았다. 찰리는 무언가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조심스럽게 둘만의 여행을 제안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성인 남녀 단 둘이 떠나는 여행,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라 거절을 당한다 해도 찰리는 담담히 받아들이고자 마음 먹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명희는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가고 싶다고, 재미있을 것 같다며 특유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었다. 아들을 홀로 남겨 두고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명희의 사정상 국내로 행선지를 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도 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외여행은 다음에 또 다른 기회를 만들면 된다. 동해바다 해안선을 달리는 동안 찰리는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둘은 바다가 훤히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 회를 먹었고 마치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바다물에 발을 담그고 백사장을 함께 거닐었다. 찰리는 용기를 내어 명희의 손을 꼭 잡았고 그녀 역시 싫지 않은 듯 그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찰리는 자신도 알지 못했던 남자의 본성이 점점 되살아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찰리는 오늘 명희와 함께 밤을 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와인을 여러 잔 들이켰다. 술에 의지해서라도 용기를 내어 이 곳까지 자신과 함께 해준 그녀에게 속내를 드러낼 참이다.


"박사님,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녜요?"


명희가 걱정스런 얼굴로 찰리를 바라 보았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좀 더 마시고 싶네요."


오늘 밤이 지나면 호칭정리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아직도 박사님이라니.. 박사님으로 불려서는 그 누구도 연애감정을 상기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 때 명희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아까부터 몇번이나 울리는지 모른다. 발신자가 누구인지 슬쩍 확인한 명희는 이내 핸드폰을 가방안에 집어 넣었다. 찰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전화를 받지 그래요. 누구인가요?"

"괜찮아요. 저희 언니에요. 오늘 아들을 대신 봐주기로 했거든요. 괜히 이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렇다면 저야 좋지만.."


찰리는 어쩌면 명희가 아들보다 자신과의 만남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밤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명희는 오랫동안 궁금해 했던 찰리의 가족사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그런데 박사님은 쭉 혼자만 사셨나요? 한국에 다른 가족분들은 없으신 건가요?"

"가족이라.."


사실 찰리는 남들에게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포함한 개인사를 일절 말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이라고 해 봤자 돌아가신 어머니밖에 없기도 하지만 그 얘기를 굳이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때는 찰리에게도 어머니의 존재가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했던 시기가 있었다. 만약 자신이 무언가를 이루고자 꿈을 꾸게 된다면 그건 전적으로 어머니를 위한 마음때문일 것이라 믿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려 이제는 그 기억이 희미해져 버렸지만 명희를 만난 이후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종종 되살아나곤 했다. 이 사람이라면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놓았던 응어리를 끄집어내도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위로를 받고 싶었다.


"저에게도 어머니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감정을 잃어 버린지 너무 오래되었네요. 전에 그렇게 말씀하셨죠. 방송으로만 비치는 모습이 내 전부가 아닐 거라고.. 뭔가 내면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에요. 맞아요. 밖으로 보이는 것만이 제 전부가 아닙니다."


찰리는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결심이 선 듯 짐짓 무게를 잡고 말을 이었다.


"명희씨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전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저와의 삶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새로운 인생을 선택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그 때 어머니를 마음속에서 떠나 보냈습니다."


찰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명희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아 왔을 거라 생각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저 찰리에게서 밖으로 풍기는 이미지가 그러했다. 그런데 아니었다니. 찰리 역시 명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힘겨운 삶을 살았고 크나큰 상실을 경험했다. 모든 아픔을 감내하고 절치부심 노력한 끝에 이 자리에 우뚝 선 것이다. 그 역시 자신과 다르지 않은 내면의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상실에 대한 저항을 나만의 특권이라 믿었던 오만함에 명희는 부끄러워졌다.


"물론 어머니도 힘드셨을 거에요. 아무래도 새 삶을 살아가려면 제가 걸림돌이 되었을 겁니다. 그치만 부모라면, 자기 자신보다 먼저 자식을 생각하는 응당 부모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랬군요."


명희는 조용히 찰리의 눈을 응시했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그의 눈에서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전 명희씨가 참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아드님도 부럽기만 하고요. 명희씨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고난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결코 아드님을 포기하실 분이 아니시니까요. 그렇죠?"


명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꼿꼿했던 찰리의 몸이 마치 응석을 부리는 아이마냥 흐트러졌다. 명희는 순간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는 자신의 마음을 보았다. 아뿔싸, 이런 감정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말이 되지 않는다. 내가 지난 몇년간 어떤 심정으로 그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는지 벌써 잊어버린 것인가. 오랜 결심을 저버리고 마음을 허락해 버린 스스로에게 실망한 탓에 명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찰리는 명희의 눈에 고인 눈물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자 점점 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둘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서서히 젖어들고 있었다. 명희는 격정어린 찰리의 감정이 더 이상 흐트러지지 않도록,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도록 조용히 그를 품에 안았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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