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지자 흐트러진 마음은 점점 격정에 휩싸였다. 찰리는 명희와 함께하는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른다. 명희의 갸냘픈 몸이 자칫 부서질세라 조심조심 껴안은 찰리는 잠시 깊은 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그녀의 가슴속 진동이 자신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기분이다. 찰리는 조심스럽게 명희의 셔츠단추를 풀어 헤쳤다. 이내 그녀의 속옷이 드러나자 찰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한 듯 명희의 어깨가 들썩였다. 마침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명희의 하얀 속살이 드러나자 찰리는 그만 이성을 잃고 자신의 몸을 그녀에게 강하게 밀착시켰다. 강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찰리의 거친 몸이 명희의 품안으로 파고 들자 명희의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서로의 몸이 하나가 된 후 찰리는 그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인냥 자신의 품안에 꼭 껴안았다. 그렇게 젊은 밤이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새벽이 되어 명희는 잠에서 깨어 났다.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라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오랫동안 그려본 이 상황이 예상만큼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머리속 생각과는 달리 가슴은 이토록 평온할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이 사람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내가 정말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일까.' 예상과 다르게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에 이질감을 느낀 명희는 순간 죽은 남편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줄기세포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어. 그 사람의 말은 터무니 없는 거였다고. 그 사람은 과학자가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언론플레이만 하는 사기꾼이야. 나는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바쳤는데 그는 나를 헌신짝 취급해 버렸어."
고통에 부르짖는 머릿속 남편의 외침과 달리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는 찰리의 온화한 얼굴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 그렇다. 명희의 마음속엔 찰리에게서 아들의 치료를 약속받겠다는 허무맹랑한 바램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이유는 오로지 남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뿐이었다. 지난 3년간을 그 생각만으로 버텨왔다. 아픈 아들을 돌봐야 하는 시간마저 허비한 채 그렇게 명희는 오랜 시간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 사실, 참으로 안타까운 시간이다. 훌훌 털어버리고 아들과의 남은 인생을 제대로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한 엄마의 모습이겠지만 명희는 남편의 생전 마지막 얼굴이 도저히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의 마음이 이토록 크게 흔들리고 있다니..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명희의 손을 찰리가 슬그머니 붙잡았다.
"왜 벌써 일어났어요? 잠이 오지 않는 거에요?"
"네, 저 때문에 깬 거에요?"
찰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가로 저은 후 뒤에서 명희를 껴안았다.
"고마워요. 내 곁에 있어 줘서."
순간 명희는 구역질이 올라오는 듯 속이 뒤틀리며 마음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계속해서 남편의 얼굴이 머릿속에 아른거리기 때문이었을까 찰리의 얼굴을 보는 것에 갑작스런 죄책감이 밀려 왔다. 찰리의 좋은 면만을 바라보고픈 마음속 생각과는 달리 머릿속에서 반복해서 울리는 남편의 외침을 외면할 수 없었던 명희는 조심스럽게 그 날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었다.
"저기..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요. 뭐든지 물어 봐요."
찰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명희를 보며 웃었다. 지금 이 순간 남부러울 일이 뭐가 있겠는가. 찰리는 그녀가 원하는 무엇이든 흔쾌히 다 들어주고자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3년전, 보도가 되었던 그 사건의 진실에 대해 알고 싶어요."
"네? 3년전이라 하면.. 음.."
사실, 찰리는 언젠가는 불미스러운 그 때 사건에 대해서 명희에게만큼은 해명을 해야 하지 않을까 마음속에 준비는 하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에게 아들의 치료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을 주기 위해선 어떤한 의심의 눈초리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의 시기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달콤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하필 지금이라니. 찰리는 자신이 마음에 품고는 있는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인가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었으나 애써 아닌 척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언젠가는 그에 대해 확실하게 해명을 해 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그게 지금 이 타이밍이라니.. 좀 당황스럽기 하군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명희씨 입장에선 궁금하겠죠. 불안하기도 할 테구요. 하지만 제가 장담하겠습니다. 앞으로 그런 일은 절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제가 좀 안일했습니다. 그게 말이죠."
찰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명희 입장에선 용납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찰리의 연구팀에 소속된 직원이 독단적으로 찰리의 이름을 빌려 병원들과 결탁해 난자를 체취해 왔다는 것이다. 찰리는 그런 일을 시킨 적도 없으며 그에게 그런 권한을 부여한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의 그 직원은 대체 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인가? 그에게도 다리가 좋지 않은 아들이 하나 있었던 모양이다. 불법적인 일이라지만 어떡해서든 찰리의 연구에 도움이 된다면 자기 아들도 치료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찰리는 호되게 그를 꾸짖었다고 한다. 아들의 치료는 자신이 도움을 줄 수가 있지만 어떻게 그 이유로 불법적인 일을 저지를 수가 있냐고, 지금 네가 한 일은 명백한 범죄행위라고 그를 윽박질렀다. 그러나 그 직원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는 못할 망정 한 술 더 떠 그 사건을 빌미로 찰리를 협박했다고 한다. 급기야 금전적 보상까지 요구하는 그를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찰리는 마침내 그를 경찰에 고발했다. 사실 이 사건에 대해 아직까지도 각계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왜냐하면 피의자로 조사를 받던 그가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려 그 날의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한 채 그대로 묻혀 버렸기 때문이다. 직원의 정체는 바로 명희의 남편 박정민이었다.
"사실 정민이는 내가 많이 아끼는 직원이었어요. 일에 나름 열정적이어서 내가 참 많이 의지하고 도움을 주기도 했었거든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바로 그 꼴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믿고 의지했는데 이렇게 제 뒷통수를 칠줄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명희씨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도 세간에는 저에 대한 모함들이 팽배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정말 말 그대로 모함입니다. 전 그렇게 나쁜 인생을 살지는 않았거든요."
명희는 아닌 척 했으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그동안 그녀가 남편 곁에서 직접 경험하고 마주했던 사실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가 찰리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내 남편은 절대 그런 인물이 아니다.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며 울부짖고 싶었다. 명희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는 조심스럽게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그럼, 그 사람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나요? 가족들도 있을 텐데.."
"아, 정민이 말인가요? 걔가 그렇게 강심장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조사를 받던 중에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거든요. 어느 사찰이랬던가. 아무튼 그랬을 거에요. 참 애석한 일이죠. 감당을 하지도 못할 일을 너무 크게 벌려 버렸어요. 빼돌린 돈도 많았을 텐데 왜 그랬는지.. 그 때문에 제 연구에 차질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만 전 정민이를 더 이상 원망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정민이를 생각하면 저도 가슴이 아프거든요. 내가 좀 더 마음을 헤아려 줬더라면, 먼저 나서서 상황을 파악하고 손을 내밀어 줬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죠."
안타깝다고 눈시울을 붉히는 찰리의 눈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명희는 그게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고픈 악어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마음을 헤아리고픈 사람의 아내가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데도 그는 그 사실조차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찰리에게 우리 식구의 안위는 관심조차 없었을 것이다. 명희는 불과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남편의 죽음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고민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어젯밤 찰리에게서 느꼈던 연민을 잠시나마 사랑으로 착각을 했던 것이 죽은 남편에게 커다란 죄인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은 예전부터 그녀가 인지하고 있던 그대로 복수의 대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찰리는 살며시 명희를 품에 안았다. 명희는 그의 품안에서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복수를 재차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