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잠 (17)

by 드루리

앗!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눈앞에 있는 내 손의 윤곽이 이제 점점 명확해 지고 있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눈의 상태 때문에 나는 또 한번 벅찬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 나는 당장 휠체어에 옮겨 타 부엌으로 나갔다. 여전히 선명한 사물의 형태를 파악하기란 쉽지가 않지만 이전보다 훨씬 좋아진 눈은 내 움직임을 월등하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이미 동선을 파악한 부엌은 물론이고 아직 미지의 공간이기만 했던 다용도실과 현관앞 계단까지 이제는 자유자재로 움질일 수가 있다. 오랜 시간 꿈꿔온대로 집밖에서의 생활 또한 머지 않은 일일 것 같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하지 않던가 하늘이 나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이유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새 삶을 살고자 하는 내 의지에 탄복했기 때문이리라. 한껏 기분이 좋아진 나는 오늘도 엄마가 퇴근하고 돌아오시기 전에 맛있는 저녁식사를 준비해 놓으리라 다짐했다. 조만간 요리책마저 볼 수 있게 된다면 그동안 어렵다고 외면했던 갖가지 음식들을 손수 다 만들어 볼 생각이다. 스스로의 생각에 심취해 한참이나 꿈과 희망에 사로잡혀 있던 그 때 갑작스레 '딩동' 벨소리가 울렸다. 엄마가 집에 없는 이 시간에 우리 집을 방문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나는 좀전까지 벅찬 기운에 사로잡혀 있던 가슴을 쓸어내리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응, 혹시 엄마 계시니?"


뜻밖에도 낯선 남자의 음성이 들려 왔다.


"아뇨. 근데 누구시죠?"

"응..그게.. 나는 엄마랑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친구인데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엄마 친구라고? 나는 혹시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게 아닐까 하는 걱정에 얼른 대문을 열었다. 아직 휠체어에 의지한 채 계단을 내려 갈 수는 없지만 밝아진 시야 덕분에 누군가의 발걸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은 인지할 수 있었다. 건장해 보이는 남성의 형체가 조금씩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네가 진우구나."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혹시 저희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에요?"

"응? 아니, 그런 건 아니야. 혹시 엄마가 집에 계신가 보려고 왔는데 안 계신가 보구나."

"아뇨. 아침에 출근하신다고 나가셨는데.. 아저씨 우리 엄마랑 같은 직장 동료라고 하셨잖아요?"


순간, 나는 이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같은 직장에 다닌다고 했으면서 왜 엄마를 우리집에서 찾는 것일까? 나는 잔뜩 경계를 하며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뭐에요? 정말 엄마 친구 맞아요?"

"미안해. 갑자기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그치만 정말이야. 내 이름은 김선우라고 해. 지난 며칠간 너희 엄마 연락이 잘 되지 않아서 찾아 왔어. 그런데 눈이 잘 안 보인다고 들었는데 너 내가 보이는 거니?"

"아.. 그게요."


김선우라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선우아저씨에 대해 엄마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 회사에서 당신의 일을 물심양면 도와주시는 고마운 분이라고 말이다. 나는 최근 들어 눈이 보이기 시작하는 내 몸상태에 대해 설명을 했다. 엄마를 도와주는 고마운 친구분이라면 어쩌면 내 마음도 헤아려 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 정말 다행이구나. 잘 됐어."


다행이라고 내 몸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서 편안함이 느껴졌다. 필연적으로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근데 아저씨, 최근 들어 우리 엄마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아, 그게 말이다."


선우아저씨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흐릿하지만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안색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아냐, 아무것도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묻고 싶었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선우아저씨에게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엄마가 매일매일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어떤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사시는지, 그리고 엄마가 나에 대해 다른 이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엄마의 일상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잠시 집안에 들어오시겠어요?"

"아냐, 그만 가 봐야지. 엄마가 어제 집에 돌아오셨다니까 다행이구나. 그것만 알면 됐어."

"네. 그렇군요."


나는 아쉬운 마음에 애꿎은 선우아저씨의 팔만 만지작 거렸다. 오랜만에 엄마가 아닌 누군가와 직접 대화를 한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한껏 들떴건만.


"그런데 진우야."

"네"


선우아저씨는 무언가 중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희 엄마는 정말 열심히 사셨어. 네 몸이 어서 건강해지길 그 누구보다 바라셨고."

"알아요. 우리 엄마 나를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하셨다는 거. 그런데 제가 엄마에게 함부로 대했어요. 제가 엄마에게 마음고생을 하게 만들었어요. 근데 이제는 정말 그러지 않을 거에요. 앞으로는 정말 엄마를 위해 최선을 다할 거에요."


내 눈에서 나도 모르는 눈물이 흘러 나왔다. 일면식도 없는 낯선 아저씨 앞에서 이런 가슴속의 응어리를 토로하게 될 줄은 미쳐 알지 못했다. 갑자기 내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만큼 선우아저씨에게는 무언가를 의지하고픈 남다른 선함이 느껴졌다.


"그래,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구나. 진우야. 그런데.. 혹시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엄마를 너무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갑작스런 아저씨의 말이 너무 의아해 재차 물었지만 선우아저씨는 한참이나 묵묵부답이었다.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선우아저씨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 정답이란 없는 거거든.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답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그녀로서는 그게 최선이었을거야."

"네? 아저씨 그게.."

"그만 가볼게. 만나서 반가웠어. 정말이야. 부디.. 건강하거라."


선우아저씨는 오랫동안 내 얼굴을 바라본 후 못내 아쉬워하며 힘겹게 뒤돌아섰다. 나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눈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이나 현관앞에 앉아 있었다. 마음 속 의문은 여전하지만 애써 외면한 채 집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나는 과연 엄마가 갑작스런 선우아저씨의 방문에 대해, 그리고 내가 아저씨와 나눈 대화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하실지 궁금해졌다. 왠지 모를 아쉬운 마음은 조금씩 내 몸의 기운마저 앗아가 버렸다. 그리고 이내 눈 앞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응, 내 몸이 왜 이러지? 갑작스레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 몸이 축 늘어져 버린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내 몸을 억지로라도 바로 세워 힘겹게 침대로 가 몸을 뉘였다. 아무래도 지난 며칠간 엄마가 건네준 약을 먹지 않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쓸데없이 몸상태를 낙관했던 나의 고집은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조금씩 내 머리를 갉아먹고 있었다. 나는 갑작스런 몸의 발작이 당황스러웠지만 이 또한 견뎌내야 한다고 다짐했다. 나는 엄마가 챙겨주신 약을 바로 옆에 두고도 먹지 못한채 스르르 눈을 감아 버렸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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