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잠 (18)

by 드루리

또 한번 벨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언니에게서 온 전화다. 명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응, 언니. 정말 미안해.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너 대체 어디야? 왜 안 돌아오는 거야? 지금 진우가 많이 아파. 많이 아프다고."


진우가 많이 아프다고? 명희는 갑작스런 언니의 외침에 가슴이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자신의 아들이 많이 아프다는데 구태여 이 여행을 계속 해야만 할까? 그러나 명희는 포기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오늘 아침에 찰리의 입에서 전해 들은 파렴치한 언행을 생각해 본다면 이대로 순순히 발길을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니, 정말 미안해. 내일, 내일 갈게. 그때까지 조금만 더 우리 진우 부탁할게."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진우가 정신을 잃었다고. 지금 많이 위독하단 말이야."

"미안해. 언니."


명희는 미안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애써 핸드폰 전원을 끌 수밖에 없었다. 명희는 오늘 마음 속으로 오랜 기간 설계했던 남편의 복수를 감행할 예정이다. 더 이상 마음을 조이며 안달하지 않을 것이며 괜한 마음 속 연민으로 갈팡질팡하지도 않을 것이다. 찰리는 남편 뿐 아니라 자신과 진우의 마음까지도 조롱했다. 어쩌면 찰리도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헛된 바람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명희는 오늘 밤 연구소에서 찰리에게 수면제를 먹인 후 그가 공언하는 줄기세포의 허망한 실체를 폭로할 계획이다. 연구가 허위임을 밝히기 위해선 당장 찰리의 증언이 필수적이지만 일단은 먼저 부딪혀 볼 생각이다. 너무나 무모한 계획이라 위험부담이 따르겠지만 명희에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명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라곤 그녀를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믿는 찰리의 섣부른 감정, 그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시간을 너무 지체한 탓이었을까. 찰리는 구불구불 어두워진 이차선 도로를 달리느라 적잖이 얘를 먹었다. 옆좌석에 앉아 있는 명희가 목이 아픈 듯 연신 기침을 하는 통에 괜히 걱정이 되었다.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었으나 아직 예약한 숙소에 도착하기엔 1시간이나 남아 있다.


"명희씨, 몸은 좀 괜찮아요? 미안해요. 내가 괜히 시간을 지체했나 보군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명희는 애써 웃음을 지었지만 찰리는 그녀의 표정이 어제와는 다르게 많이 어두워 보였다. 마음이 조급해진 그는 좀 더 속도를 높여 도로를 질주했다. 어두운 길이지만 다행히 한적한 도로라 길이 막히지는 않는다. 좀 더 서둘렀다면 좋았을 텐데, 숙소를 가까운 곳으로 구했으면 좋았을 텐데. 한가지 생각에 깊이 사로잡혀 버린 찰리의 머릿속엔 온통 시간을 앞당기고 싶은 후회로 가득차 버렸다. '따르릉' 그 순간 찰리의 클래식한 핸드폰 벨소리가 어두운 적막을 깨트렸다. 힐끗 핸드폰의 발신자를 확인한 찰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명희에게 양해를 구한 후 전화를 받았다.


"네, 김연구원님, 무슨 일이시죠? 급한 일이 생겼을 때만 연락을 달라고 했는데.."

"박사님, 죄송합니다. 지금 이 얘기를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깜짝 놀라서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게... 3년 전 죽었던 박정민 연구원이 말입니다."

"박정민이요?"


찰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동안 통화를 이어갔다. 찰리의 입에서 남편의 이름이 들리자 명희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찰리의 얼굴을 응시했다. 당혹스럽다는 듯 찰리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명희는 통화를 하는 와중에도 힐끔힐끔 자신을 쳐다보는 찰리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명희는 하필이면 복수를 계획한 오늘밤 찰리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 차리게 된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 사실을 애써 숨기지도 않았는데 이제서야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그의 안일함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오랜 통화가 끝난 후 잠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찰리가 무거운 표정으로 명희에게 질문했다.


"명희씨,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당신 정민이 아내였습니까?"


올 것이 왔구나. 명희는 크게 쉼호흡을 하고는 대범한 척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맞아요. 그걸 이제 아셨어요?"


혹시나 했던 찰리의 표정이 점차 더 크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찰리는 스스로가 이토록 한심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일까. 미련하게시리. 찰리는 그녀가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럼, 뭐에요? 나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하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왜? 무엇 때문에?"


명희는 가슴이 콩닥콩닥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부인을 했어야 하는 걸까. 지난 몇년간 가슴 깊이 품어왔던 복수의 시간이 이토록 허망하게 끝나 버리는 것일까.


"정말이군요. 허.. 내가 그렇게 바보처럼 보였어요? 당신 지금 뭘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아니에요. 뭐라고 대답을 해 봐요. 네!!"


찰리의 목소리가 점점 험상궂게 변했다. 찰리는 어디 차를 멈춰 세울 만한 곳이 없을까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아직 꼬불꼬불 어두운 바닷길이 끝이 나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그 때, 불현듯 명희의 머릿속에 위험한 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대로 내 계획을 망칠 수는 없어. 남편의 복수를 감행하겠다는 무모한 집착이 순간적으로 명희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명희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고개를 돌려 주위를 관찰했다. 찰리와 함께 달리는 그들의 차를 제외하고는 이차선 도로 어디에서도 인적이라곤 좀체 찾을 수 없었다. 명희의 움직임을 인지한 찰리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지금 뭐하는 거에요?!"


찰리는 명희의 움직임을 제지하려고 한 손으로 명희의 가슴을 억눌렀다. 명희는 찰리의 손아귀힘에 잠시 몸을 가누지 못했으나 덜컹이는 차체의 반동으로 이내 자유를 되찾았다. 찰리는 명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직감하고는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만둬!!”


차가 절벽끝 커브길에 진입하자 명희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힘을 총동원하여 찰리에게로 몸을 내던졌다. 여성이 남성의 힘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어둡고 꼬불꼬불한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 안에서 찰리는 속수무책으로 명희에게 주도권을 내어주고 말았다. 으악!! 단발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차는 곧장 절벽아래로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찰리는 낙하하는 차량 운전대에 강하게 머리를 부딪힌 후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일까. 절벽 아래로 떨어진 차는 이윽고 굉음을 내며 화염에 휩싸였으나 이내 파도에 휩쓸려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 그들은 그렇게 하염없이 심연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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