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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루리 Nov 21. 2022

앵무새 죽이기(하퍼 리)를 읽고..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학교에서는 여러모로 책읽기를 권장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살면서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시기가 바로 중학생시절이 아니었나 싶네요. 아무 걱정없이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때는 시야의 폭이 넓지 않아 뭐가 뭔지 잘 몰랐던 관계로 셜록홈즈를 제외하곤 글읽기에 흥미를 붙일 수 없었거든요.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는 입시준비와 사회에 나갈 준비에 여념이 없을 터라 책을 읽을 시간이(아니 여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운영하던 클럽활동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관심사가 그것인지라 저는 당연하게도 독서반에 가입을 했었네요. 격주에 한번씩 선생님이 추천도서를 지정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중 첫번째로 펼쳐 들었던 지정도서의 제목이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책장을 전혀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추리소설에 빠져 있던 시기라 무언가 자극적이고 충격에 휩싸이게 만들 사건을 원했었나 봅니다. 1인칭 화자가 여섯살 난 소녀라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거니와 너무도 무미건조한 소녀의 일상을 말하는 소설의 내용에 빠져들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30여페이지나 읽었으려나요. 이내 책을 덮어버린 채 오랜 기간 책장 깊숙이 방치해 버렸습니다. 잠시잠깐 읽고 지나쳤던 소설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의 원제가 '앵무새 죽이기'였다는 사실은 십수년이 흘러 성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범상치 않은 작가의 이름 덕분이었습니다. '하퍼 리'의 고전 명작이라..

'앵무새 죽이기'.. 반감 가득했던 이 엄한 제목의 소설이 편견도 차별도 없는 청정무구한 아이들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었다니.. 성숙치 못했던 개인적인 감정을 소설의 제목에서부터 실감하게 하는군요.


1930년대, 미국의 경제는 날로 피폐해져만 갑니다. 대공황을 겪던 그 시절 특히나 암울한 시기를 보내야만 했던 앨라바마 주의 작은 마을 메이콤이 여섯살 소녀 '스카웃'이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어린 소녀의 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어른들이 마주하는 현실과 크나큰 차이가 있습니다. 내가 지극히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들의 눈에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물론 어른들의 언어로 표현하는 세상이 항상 옳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작정 그것이 옳으니 따르라고 윽박지릅니다. 비단, 인종차별이 극에 달했던 1930년대의 메이콤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에서도 여전히 권위주의를 위시한 아집과 편견의 시선은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스카웃'에게 오빠 '젬'은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친구이자 든든한 내 편입니다. 집안에 틀어박힌 채 한발자국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부 래들리'의 존재는 젬과 스카웃에게 공포의 대상입니다. 저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옆집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가 집을 비워 놓으신 채 이사를 가던 날, 어린 시절의 저와 제 동생은 밤이면 불도 들어오지 않는 그 집에 누군가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괜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긴장감을 즐겼는지도 모릅니다. 용기를 내어 집안에 발을 내딛던 날,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려 허탈해 했었으니까요. 어느덧 젬과 스카웃에게 '부 래들리'의 존재는 호기심을 부추기는 대상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변호사입니다. 에티커스 핀치는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강간미수사건의 피의자를 변호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변호를 계기로 아버지에게로 향한 부정적인 눈초리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젬과 스카웃 역시 아버지를 향한 뭇 사람들의 시선이 180도 달라져 버렸음을 인지합니다. 그 이유는 피의자로 기소된 이가 바로 흑인 '톰 로빈슨'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흑인을 변호할 수가 있나? 마을사람들의 성토는 끝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애티커스 핀치는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톰'을 변호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사실, 범행의 진실은 이미 드러나 있습니다. 톰이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누명을 쓴 선의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독자들 뿐 아니라 이를 부정하는 마을 사람들 역시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눈과 귀를 닫아 버립니다. 애티커스 핀치를 제외하고 말이죠. 여섯살 소녀 스카웃의 눈에도 보이는 진실을 그들은 외면해 버립니다. 결국 톰은 자신의 무죄를 입증되지 못한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오빠와 경쟁하고, 친구를 사귀고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고민하는 어린 소녀의 시각이 참 애틋하게 느껴졌습니다. 계층간의 차별이 극대화되었던 당시 미국의 시대상을 생각해 본다면 자신과 어른들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이토록 커다란 것인가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동일한 관점에서 흑인문제를 대하는 애티커스 핀치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기에 선한 영향력을 더욱 크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스카웃에겐 3년이란 시간의 경과가 그 이상으로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지극히 당연하다 생각하는 현재의 일상이 그 옛날 당연한 것을 부정했던 그들에게 반기를 들었던 누군가의 투쟁으로 일궈낸 승리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스카웃에게 말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어치새를 마음껏 사냥해도 좋다. 그러나 인간에게 우호적이고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앵무새를 사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죄악이라고 말이죠. 결국 톰 로빈슨은 성숙치 못했던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해야 했던 무고한 앵무새였던 셈입니다. 

마지막장을 덮은 후 제 방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 있는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라는 제목이 이토록 잘 어울릴 수가 없었구나.. 실감하게 됩니다. 아직, 세상을 다 보고 배우지 못한 아이들의 눈에서도 보이는 세상의 이치가 왜 그 때 그 시절의 어른들에겐 보이지 않았던 걸까요? '피부색에 연연하지 않고 그 사람의 속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저에겐 단지 인종차별만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와 너를 나누는 순간, 무엇이든 편견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어른의 눈이 아닌..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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