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잠 (6)

by 드루리

명희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지난 밤 감기 몸살로 고생한 진우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명희는 새근새근 잠이 든 진우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이마를 짚어 보았다. 아직 미열이 남아 있지만 다행히 힘든 고비는 지난 듯 하다. 명희는 그제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다행이다. 우리 아들"


명희는 한참동안이나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잠든 진우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세상 편하게 잠이 든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마음도 평온해 지는 기분이다. 명희는 입은 다문 채 마음속으로 소리내어 진우에게 말했다.


'진우야, 그 사람을 만났단다. 이제 멀지 않았어. 조금만 더 참으면 우리에게도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우리 아들 그동안 고생많았어. 엄마를 믿어줘. 알겠지? 오늘도 잘 지내고 있어. 엄마 다녀 올게.'


이렇게라도 진우에게 하루 일과를 보고해야만 자신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질 것 같다. 엄마라는 사람이 아픈 자식은 돌보지 않고 밖에서의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으니 나는 부모로서 낙제점이다. 자책의 시간도 잠시 명희는 어서 오늘의 일과를 시작할 채비를 했다. 명희는 조용히 진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난 후 집을 나섰다. 마트에서 일하는 명희의 처지는 아들의 마음을 온전히 어루만져 주기엔 녹록치가 않았다. 당장 자신의 마음도 피폐해지는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가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남편이 죽고 홀로 아픈 자식을 돌봐야 하는 가장으로서 명희의 삶은 고되고 힘든 나날의 연속이다. 오늘도 아침부터 매니저의 성화가 명희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아들이 많이 아파서 좀 늦었어요."

"아니, 누구는 자식이 없는 줄 아나. 일이 있어야 가족도 먹고 사는 거지, 안 그래요? 그렇게 가족만 생각할 거면 뭐하러 회사를 다니는 거에요. 나도 몇달째 연차도 못 쓰고 일하고 있는 거 안 보여요. 바로 당신같은 사람 컨트롤 하느라 말이요."


명희는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침부터 내내 매니저의 눈치를 보느라 평소에는 하지 않던 실수도 남발했다. 회사동료들뿐 아니라 마트 고객들에게까지 사과만 하는 일과가 지속되었다. 명희는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정신없는 마음을 겨우 추스를 수 있었다.


"언니, 오늘 너무 힘들었지? 신경쓰지 마. 매니저님 저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나 봐. 개가 또 짖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니까."


친하게 지내는 회사동료 윤정이 명희에게 다가왔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수다는 명희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바쁘고 힘든 일상에 그나마 활력소가 되는 고마운 친구다. 내성적인 성격탓에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내적 아우성을 그녀는 내 마음까지 대변하듯 속시원하게 내뱉었다. 명희는 항상 건네는 고맙다는 말 대신 환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때 같은 직장동료인 선우가 그들 곁을 지나갔다. 키도 훤칠하게 크고 남자답게 생긴 탓에 여직원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동료다. 평소 그와 가까이 지내며 서로의 고민을 공유하던 명희는 선우와 시선을 교환한 후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사이의 묘한 기류를 느꼈는지 윤정이 명희에게 바싹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들이 밀었다.


"언니, 선우씨랑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그치?"

"응? 얘는 그게 무슨 말이야?"


명희는 당황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무슨 말은.. 알면서 그래. 며칠 전에도 선우씨랑 단둘이만 있는 거 내가 봤단 말이야. 나뿐만이 아닐 걸. 여기 직장동료들 다 알고 있어. 다들 그래. 언니덕에 곧 국수 먹는 거 아니냐고 말야. 국수가 아니라 부페겠지만."


명희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키득키득 웃고 있는 윤정의 놀림이 가히 싫지만은 않았다. 윤정의 말대로 명희는 최근 선우와의 만남이 잦았다. 얼마 전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그 역시 명희와 같은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한 것은 아니었다지만 아직 신혼이었던 선우의 흔적들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곳곳에 묻어났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아내가 떠나고 나니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정말 웃긴 것은 좋았던 일보다 안 좋았던 일들만 계속 생각이 난다는 겁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화내고 투덜댔던 일들 말이에요. 꿈속에서도,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가 아니라 늘 가슴 아프게 눈물만 흘리는 그녀가 나를 찾아 와요. 있을 때 잘할 걸. 그 흔한 말이 이렇게 뼛속까지 사무치는 말인지 몰랐습니다."


명희는 자신 앞에서 경계심을 모두 해제해 버린 듯 하염없이 울고 있는 선우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를 꼭 안아주었다. 다른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내 처지가 투영되어, 선우에게서 눈앞에 나타난 스스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일까. 명희와 선우는 흔치 않은 만남만으로도 서로를 의지하게 되었고 서서히 애틋한 감정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명희는 며칠 전 찰리의 강연회장으로 그를 인도하게 되었다. 쉽지 않은 부탁이었는데도 선우는 흔쾌히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선우에게 자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니 아들을 위하는 명희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우는 명희가 의도한 것 이상으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였다. 덕분에 명희는 결심한 것보다 더 큰 용기를 내었고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바로 찰리의 부름을 통해서 말이다. 명희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를 받기 위해 윤정의 곁을 피해 화장실 뒷편으로 몸을 옮겼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여기는 바이오텍 연구소입니다. 혹시 최명희선생님 맞으신가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전화벨이 울리는 그 순간부터, 낯선 번호를 확인한 그 순간부터 명희는 발신자가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전화를 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 순간이 오기를 오랫동안 고대했기 때문이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연구소 찰리 강 박사님께서 최명희 선생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혹시 언제 시간이 괜찮으신가요? 아, 다른 이유때문은 아니에요. 박사님께서 최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 하십니다. 내일이요? 네, 좋습니다. 박사님도 최대한 빨리 뵙고 싶어하시니까요.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명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침착하게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짧은 전화통화만으로도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하다. 명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누구보다 내 마음을 잘 알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진우가 '엄마, 잘했어요!' 라며 환하게 웃어 줄 것만 같았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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