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잠 (5)

by 드루리

찰리에게 정사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특히 낯선 여자와 몸을 섞을때면 아무런 감정없이 그저 그 행위에만 집중할 수 있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긴 하루를 보내고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오면 쓸쓸하고 적막한 기운에 몸서리치지만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오늘도 찰리는 그녀와의 정사로 힘든 하루의 소회를 대신했다. 쌕쌕대는 그녀의 숨소리가 느껴진다. 정사는 끝났지만 그녀가 좀 더 이곳에 머물러 줬으면 좋겠다. 이름이 유미라고 했던가. 아무런 감정없이, 아무런 대화 없이 그냥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그 사실 하나면 족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무수한 질문이 쏟아진다.


"나는 오빠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 줄 몰랐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치장하고 올 걸 그랬어요. 안 그래요? 공부는 어디서 그렇게 한 거에요? 나는 똑똑한 사람들이 그렇게 부럽더라. 미국인이라던데 가족은 없어요? 다들 미국에서 안 들어온 건가. 그래서 한국에는 언제까지 있는 거에요?"


제기랄, 아무 말 없이 고분고분 조용한 여자라서 좋았는데 이렇게 수다쟁이인 줄 알았다면 재차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찰리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도저히 숨길 수 없었다.


"앗, 내가 너무 말이 많았나. 그런데 걱정하지마요. 나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나 입 무거운 여자에요."


킥킥대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신경을 거슬린다. 불과 1시간 전까지만 해도 과묵하게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그녀를 꽉 안고 싶었으나 지금 찰리에겐 그녀의 존재가 하찮게만 느껴졌다. 찰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는 지갑을 열어 10만원권 수표 여러장을 꺼내 들었다. 희미한 불빛에 수표 갯수를 확인한 찰리는 이윽고 유미가 누워 있는 침대 머리맡에 돈을 던졌다.


"그만 가. 이제 다시 부를 일은 없을 거야."


"어머, 왜 그래요?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거에요?, 아님 내가 오늘 영 별로였나?"


"그런 거 아니니까 가 줘."


찰리는 유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거실로 나갔다. 곧이어 그녀가 따라 나왔다. 찰리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냉장고안에 있는 맥주를 꺼내 들고는 터벅터벅 소파에 다가가 몸을 뉘였다. 등 뒤로 체념한 듯한 그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알았어요. 그만 갈게요. 나도 뭐 나 싫다는 사람한테 관심없어요. 그리고 이 돈, 애초에 약속한 만큼만 받을래요. 나도 당신만큼은 아니겠지만 원칙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거든."


유미는 찰리에게서 받은 수표 중 몇 장을 보라는 듯 찰리의 눈높이에 맞게 맞은 편 소파 위에 올려 두었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쾅' 유미가 나가는 문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찰리는 소파에 파묻힌 채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휴~ 또 한번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몸속으로 스며든 알콜이 쓸쓸한 기운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켰다. 찰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힘들었던 하루 일과를 되짚어 보았다. 생각해 보건데 오늘의 강연이 어떻게 마무리가 된 것인지 좀체 알 수가 없었다. 몇년 전 불법 난자 체취로 홍역을 앓았었는데 그 때의 악몽이 또 한번 머릿속에 되살아나는 것 같아 초조해졌다. 그런데 그 여자,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구세주라도 되는 냥 자신을 변호해 줬던 그녀의 얼굴이 계속해서 아른거렸다. 또 한번 맥주를 들이킨 찰리는 잠시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불현듯 오래된 옛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찰리는 작은 방 서재로 들어가 오랜 기간 잠들어 있던 작은 박스 하나를 꺼내었다. 박스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질 정도로 닳고 바랬다. 언제가는 버려야 하는 물건이라 생각했건만 이렇게 센치한 기분으로 다시금 꺼내 보게 될 줄 알았을까. 찰리는 조심스레 박스 한 켠에 있는 사진 몇장을 꺼내 들었다. 오랜 시간 잊고 살았지만 마치 소중한 보물인냥 속속들이 위치를 기억 하고 있다. 머리로만 잊어야지 생각했을 뿐 마음 한켠으로는 여전히 애틋하고 소중한 감정을 간직하고 있었던 건지 모른다. 사진 속에는 10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그를 한아름 두팔에 안고 있는 중년 여성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찰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아니, 일부러 무표정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으나 마음속으로는 이미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지 모른다. '엄마..' 찰리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똑딱똑딱 이 큰 집안에서 혼자서만 울리는 시계소리가 오히려 적막한 분위기를 깊게 드리웠다. '따르릉~' 마침내 오랜 적막을 깨려는 듯 서재밖 거실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고지식한 그답게 정말 클래식한 벨소리다. 찰리는 무거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의 연구팀 직원중 한명이었다. 분명 낮에 부탁한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용건일 것이다.


'박사님, 이름은 최명희이고 말씀대로 남자 아이가 하나 있는데 남편과는 사별을 했더라고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난 몇년간 박사님 연구에 가장 많은 후원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찰리는 무심한 듯 담담한 말투로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마음으로는 전혀 담담하지가 않았다. 통화를 마친 후 궁금증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남편과 사별이라, 게다가 젊은 나이인 것 같은데 불구가 된 아들을 두고도 그렇게 많은 돈을 후원했다니. 찰리는 그녀에 대한 관심이 이전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당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동안 독신인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는 한 둘이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을 한사코 거부했던 이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믿을 수 없는 동물, 찰리에게 여자란 애초에 그런 존재였다. 후원금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껏 이런 저런 연유로 우리 연구팀에 개인적인 후원을 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으니 그 역시 이유가 되지 않는다. 무엇일까.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게 대체 얼마만인던가. 게다가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한 낯선 여자에게서 말이다. 한참동안 생각하던 찰리는 마침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찰리는 손에 꼭 쥐고 있던 어머니 사진을 다시 한번 쳐다 보았다. 명희의 얼굴이 머릿속에 계속 아른거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오래 전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를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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