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잠 (7)

by 드루리

진우의 이야기 11


'지금 거신 전화는 결번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뚜뚜뚜'

이번에도 어김이 없다. 가까스로 기억을 해 낸 친구들의 전화번호가 죄다 결번이란다. 무슨 연유일까?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단체로 이사라도 가버린 걸까? 나는 애꿎은 핸드폰만 내내 매만졌다. 내 기억력은 최근 들어 많이 좋아졌다. 이제는 어렴풋한 옛 기억들도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 물론 사고 이후의 기억은 여전히 하얀 백지상태지만 이 또한 오랜시간이 지나지 않아 되살아 날 것이다. 사실, 지우고 싶은 기억은 떠올리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나에겐 긍정적인 변화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 생각나는 전화번호는 지수의 것밖에 없다. 지수는 내 소식을 알고 있을까? 만약 모르고 있다면 내 처지를 알려야만 하는 걸까? 아니, 그 전에 1년이나 지난 옛 연인의 전화가 못마땅하게 느껴질런지도 모른다. 중학생시절 철없고 섣부른 감정을 나 혼자만 오도한 것이라면 어떡하지. 나 역시 남들 이상의 애절한 감정으로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년이 넘는 기간동안 서로를 알고 지내면서 보통의 친구들과는 다르게 더 많이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과연 그녀가 이런 나의 상태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여러번 망설인 끝에 어렵사리 그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다행히 이번에는 착신음이 울린다. 그러나 이전과 다르게 굴곡진 착신음은 좀체 그 끝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전화벨은 한참이나 오랫동안 귓가를 맴돌았다. '역시 아닌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혼잣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자의 음성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 왔다.


"여보세요."


당황한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여보세요. 전화를 거셨으면 말씀을 하세요."


그런데 분명 지수의 목소리가 아니다. 낭랑하고 쾌활했던 지수의 목소리보다는 좀 더 낮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낯선 여자의 음성이었다. 누구지? 혹시 지수 언니인가? 그러고 보니 지수에게 언니가 있었던가.


"아, 안녕하세요? 저는 지수 친구 강진우라고 합니다. 죄송한데 혹시 지수 있나요?"


이번에는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 말이 없다. '여보세요. 잘 안 들리세요?' 어느덧 용기를 낸 나는 연신 상대방의 회신을 재촉했다. 이윽고 좀 더 차분한 톤으로 같은 음성이 다시 한번 들려왔다.


"누..누구라고요?"

"네, 저는 지수 중학교때 친구 강진우라고 합니다. 혹시 지수 언니 되시나요?"


또 다시 침묵이 이어지고 끙 앓는 듯한 여성의 신음이 이어졌다. 그리고 여성은 한참만에야 망설이는 듯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전화를 잘 못 거신 것 같아요."

"아.. 그런가요? 실례했습니다."


끝인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여전히 수화기를 놓지 않았다. 나 역시 뭔가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더 이상 통화를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한참만에야 전화를 끊고 생각을 해 보았다. 잘못 걸린 전화라면서 왜 그렇게 확신이 없는 듯 오랫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었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답을 찾을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결국 쾌재를 부르며 어렵게 기억해 낸 친구들의 전화번호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 버렸다. 친구들과의 연락이 작은 희망이 될 것이라 믿었는데.. 나는 허탈한 마음에 기운이 쭉 빠져 버렸다.


진우의 이야기 12


최근 며칠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고민을 해 보았지만 지리멸렬한 내 몸과 마음으로는 도저히 돌파구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매일매일 자책과 원망이 교차하는 하루가 지속되었다. 어쩌면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그 자체가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빠져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나는 밖으로 나가고 싶다. 아니, 나가야만 한다. 엄마에게 더 이상 큰 짐을 지우기 싫었지만 결국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었다. 며칠동안 고민하던 나는 결국 엄마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고 말았다.


"뭐? 그게 무슨 말이니?"

"말씀 드린 그대로에요.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 저 절대로 방해되지 않게 할게요. 엄마가 일하시는 곳에 저도 데려가주세요. 아니, 다른 곳이라도 상관 없어요. 나가서 내가 찾을게요. 할 수 있어요. 엄마."


엄마는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갑작스런 나의 요청이 못마땅하신게 분명하다. 애써 감추려는 엄마의 한숨소리가 오히려 당신의 심경을 확실하게 전달했다.


"안 돼. 아직은. 진우는 환자잖아. 그런 몸으로 어떻게 밖에 나가겠다는 거야."

"그치만 이렇게 집에만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나가서 찾아야 한다구요. 엄마도 그러셨잖아요. 나는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용기를 내라고 말이에요. 그거 듣기 좋으라고 빈 말로 하신 거였어요? 이렇게 방안에만 틀어 박혀 있는데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용기를 낼 수 있겠어요."


이번에는 엄마의 한숨소리가 넓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예상은 했지만 이토록 단호하게 거부하실 줄은 미쳐 알지 못했다. 엄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몸뚱아리는 우리 집 거실은 고사하고 매일매일 잠을 청하는 내 방안에서조차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바깥에서의 삶은 오죽하겠는가. 자칫 내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일찌감치 깨달아 버리고 또 다시 좌절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될까 봐 그게 못내 걱정이 되시는게 분명하다.


"안 돼. 이 얘기는 없었던 걸로 하자.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엄마가 우리 진우 건강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엄마는 무슨 바람이 드신 건지 최근 들어 내 다리를 꼭 낫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을 여러번 되풀이하셨다.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은 내가 대체 어떻게 걸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런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더 이상 실현불가능한 허상에만 기대어 허송세월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엄마의 말씀을 반박하면 나보다 먼저 당신의 마음이 지쳐버릴까 봐 나는 애써 그 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엄마도 아시잖아요.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나는 영영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할 거란 걸. 그럼 말씀해 주세요. 제가 어떻게 하면 원하는 대로 해 주실 건지."


잠시 고민하던 엄마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진우야. 진우가 내 도움없이 이 집안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때, 그 때 밖에 나가는 걸로 말야. 밥도 진우가 알아서 차려 먹고, 청소도 직접 하고. 참, 운동도 잊지 않아야 해. 그렇게 이 집에서 진우가 나 없이 자유자재로 혼자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때는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엄마도 같이 찾아 볼게. 어때? 그럴 수 있겠니?"


순간 마음속의 응어리가 눈녹듯 사라졌다. 나는 엄마를 향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다. 엄마도 필시 나에게 가능성을 보았기에 이런 제안을 하시는 거겠지. 드디어 나에게도 목표라는 것이 생겼다. 이제 더이상 엄마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해 볼테다. 내 방에서부터 거실과 부엌, 마당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다면 밖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충분히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할애하여 내가 쉽게 다닐 수 있는 동선을 파악히고 이후에는 그에 맞게 내 입으로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든 찾고 말 테다. 나는 내가 사고를 당하기 전과 똑같은 마음으로 부푼 꿈에 사로잡혔다.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역시 사람에게 있어 희망이란 꿈꾸는 그 자체만으로도 찬란하고 위대한 것이리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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