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네 들어오세요."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명희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박사님"
찰리는 명희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수 그녀의 외투를 받아 주었다. 수줍은 듯 엷은 미소를 띄며 자리에 앉는 명희의 모습은 며칠 전 강단 있는 표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하얀 원피스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았다. 나이보다 훨씬 더 젊어보일 뿐더러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미소에 전형적인 미인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일전에 느꼈던 것처럼 외적으로 풍기는 명희의 이미지는 계속해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명희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3평 남짓한 작은 방이지만 갖가지 옛 장식과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클래식한 풍미를 즐기는 찰리의 성격을 고스란히 설명하고 있었다. 이윽고 명희를 방안으로 안내한 연구소 직원이 차를 가져다 주었고 둘은 말없이 한참동안 찻잔만 기울였다. 오랜 침묵을 깨트린 것은 역시 찰리였다.
"제가 명희씨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네, 그럼요. 박사님. 이렇게 불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제가 해야죠. 일전에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제가 곤경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아니에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저는 단지 박사님의 연구를 다같이 지지해줬으면 하는 바램 뿐이었습니다."
"네, 그래서 감사하다는 거에요. 명희씨의 목소리가 분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결집시켰습니다. 단순히 제가 하는 말만으로는 그 혼란을 잠재우기 쉽지 않았을 거에요."
따뜻한 차를 마시고 형식적이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이 이어지면서 어색한 기류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찰리는 단도직입적으로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쉽지 않으셨을 텐데 저희 연구소에 후원금을 많이 기탁하셨더라구요."
"아.. 네. 맞아요."
찰리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의중을 단번에 파악했다.
"다리를 못 쓰는 아드님이 계시다고요. 아무래도 그 때문이시겠죠?"
명희는 잠시 머뭇하다가 이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제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곧 연구가 끝나고 임상시험단계에서 안전성만 확보된다면 제일 먼저 아드님의 치료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아드님을 저에게 맡겨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정말이신가요? 정말로 제 아들을 치료해 주시겠다고요? 박사님."
찰리는 인자한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는 여한이 없어요."
화들짝 놀란 명희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찰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란 이런 것인가. 조금 전까지 요조숙녀마냥 얌전히 앉아 있던 그녀는 지금은 소꿉장난을 하는 어린 소녀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찰리는 왠지 그 모습이 싫지가 않았다. 자신이 그녀를 웃게 했다는 사실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오늘의 용건은 모두 끝이 났다. 찰리는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명희도 그렇게 바라던 아들의 치료를 약속받았다. 1시간 뒤에 찰리는 또 다른 일정때문에 바삐 움직여야만 한다. 명희 역시 그녀만의 일과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리는 그녀를 이렇게 쉽게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좀 더 그녀와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나아가 외적으로는 표출하지 못했던 가슴속 응어리와 내면의 이야기를 토로하고 싶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오늘 그녀와 처음 대화를 나눠 본 것 뿐인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나의 마음을 보듬어 줄 것만 같았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으로 얼룩진 자신의 상처를 엄마를 닮은 그녀에게서 치유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찰리는 감정을 최대한 자제한 채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저녁식사를 제안했다.
"혹시 오늘 저녁 식사를 같이 하시겠습니까?"
"오..오늘이요?"
"아, 일정이 있으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저는.."
"아뇨. 좋아요. 저녁 같이 먹고 싶어요."
찰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명희는 흔쾌히 대답했다. 순간 찰리는 그녀의 마음도 자신과 같지 않을까 흐뭇한 상상에 사로잡혔다. 지난 십수년간 여성에게 자그마한 공간조차 내어 주지 않았던 자신이 이토록 급격한 심경의 굴곡을 경험하게 될 줄은 미쳐 알지 못했다. 이 순간 찰리는 잠들어 있던 자신의 가슴이 서서히 깨어 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녁 식사시간은 예상보다 훨씬 더 화기애애했다. 찰리는 타지역 군수를 만나야 하는 일정을 사전 조율 없이 깨트려 버렸고 명희 역시 오후근무를 무단으로 이탈했다. 명희의 핸드폰은 무책임한 주인의 행동에 대한 질타를 혼자서만 감당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명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오랫동안 만남을 고대했던 바로 그 남자와 한 공간안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박사님은 어떤 분이실까 내내 궁금했어요."
"그러셨군요."
"네, 사실 방송으로만 보여지는 모습은 조금 차갑게 느껴졌거든요. 아무래도 연구에만 몰두하느라 너무 바쁘셔서 그러신 거겠죠."
찰리는 엷은 미소를 띄웠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남부럽지 않게 건장하고 멋진 외향을 소유했으나 그의 얼굴은 언제나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처럼 연구에 집중하느라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연유로 단지 여성을 믿지 않는 자신의 성품이 얼굴에 드러났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냉혹하고 냉철한 인생을 살았다. 남에게 곁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엄격하고 가혹하게 타인을 대했다. 나로 인해 상처를 입고 좌절을 맛 본 이들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비단 그들뿐만은 아니지. 나 역시 나이 50이 가까워지지만 성인이 된 이후 아직까지도 사랑다운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어 줄 마성의 연인이 눈앞에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불과 며칠전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어떠신가요?"
"음.. 닫힌 마음이 열린다면 그 누구보다 따뜻한 심성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해요. 아,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잠시였지만 제 마음이 그렇게 느꼈어요. 방송을 통해 외적으로 비치는 것만이 박사님의 전부는 아니겠구나라고 말이에요."
빈 말이어도 상관이 없다. 지금 이 순간 찰리는 그녀에게서 듣는 그 어떤 말도 다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명희는 참 오랜만에 스테이크를 썰었다. 남편이 죽고 난 후 아픈 자식을 돌보느라 제 입에 넣는 어떠한 것도 사치로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시였지만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환하게 웃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 자각을 하는 순간 명희의 머릿속에 진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혼자서 밥은 잘 먹고 있을까. 연락도 없이 늦는 엄마를 기다리느라 우울해 하지는 않을까. 갑작스레 명희의 얼굴에서 그늘을 느꼈는지 찰리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의중을 살폈다.
"왜 그러시나요?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나요?"
"아니에요. 너무 맛있게 잘 먹었어요. 덕분에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계를 쳐다보는 명희를 보면서 찰리는 그녀의 근심이 아들에 대한 걱정일 것이라 짐작했다. 찰리는 그녀를 오랫동안 붙잡아 두고 싶었지만 자식을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더 오래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다음을 위한 여운이라고 생각하니 찰리의 마음은 어느새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