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무슨 생각인 거요? 이제는 하다하다 무단 결근을 하질 않나. 내가 그렇게 누누이 얘기를 했는데도 생각이란 게 없어. 그러고도 월급을 받을 거라 기대하는 거요. 양심도 없이."
아침부터 매니저의 호통이 복도끝까지 울려 퍼졌다. 명희는 오늘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지금껏 남들 이상으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담당 매니저에게 질타를 받을 만큼 허투로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 만큼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당분간은 이런 정신없는 하루가 지속될런지도 모른다. 그만큼 내가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염없는 매니저의 호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명희의 처지가 안쓰러웠는지 윤정을 포함한 직장동료들이 저마다 명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운을 북돋아 주웠다. 명희는 살며시 웃음지으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의 평범한 삶을 늘 그리워 하긴 했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위로해주는 든든한 동료들이 곁에 있는 지금도 사실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다. 명희의 눈에 먼 발치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선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명희는 조용히 선우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등에 살며시 얼굴을 파묻었다. 선우는 고개를 돌려 걱정스레 그녀를 쳐다 보았다.
"괜찮은 거에요? 걱정 많이 했어요."
"네, 괜찮아요.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아들 일은 잘 된 거에요? 제가 더 도울 일은 없어요?"
명희는 미소를 지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전에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다 잘 되었거든요. 우리 진우 다리를 치료해 주시기로 하셨어요. 정말이에요. 다 선우씨 덕분이에요."
"정말요? 잘 됐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네"
선우는 마치 자신의 일이냥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명희의 웃음을 보고 있으니 마음속의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기분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서 왠지 모를 애잔함이 느껴졌다. 얼굴은 웃고 있으나 가슴으로는 여전히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기분 탓일까. 지난 1년간 선우는 명희와의 만남을 통해 그녀가 자신을 의지하는 것 이상으로 나 역시 그녀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바랬다. 이왕이면 그 행복이 자신과 함께 하는 미래이길 바라지만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그녀의 행복한 웃음 그거 하나면 충분하니까.
선우는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정문앞에서 명희를 기다렸다. 항상 뒷정리를 담당하는 명희는 오늘도 마지막이 다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선우는 소중한 것인냥 손에 꼭 쥐고 있던 에너지 드링크를 그녀에게 건넸다.
"고생했어요. 이거 마셔요."
"앗, 선우씨 어쩐 일이에요. 저 기다린 거에요?"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집에 데려다 주고 싶었어요."
명희는 뜻하지 않은 그의 기다림이 이토록 반가울 수 없었다. 명희는 짐짓 아닌 척 눈을 흘겼지만 이내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선우의 외투속으로 맞잡은 두 손이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명희의 집앞이 가까워지자 가는 시간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고마워요. 덕분에 집에 잘 왔어요. 저 앞에 골목이 때로는 무섭게 느껴지거든요."
선우는 명희가 가리키는 골목길을 쳐다 보았다. 가로등 몇 개가 서 있지만 불빛이 희미해져 시야를 온전히 밝혀 주진 못했다. 그 순간 선우는 다짐했다. 앞으로 쭉 자신이 명희의 앞길을 밝혀주는 환한 가로등이 되겠다고 말이다. 선우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등 뒤에서 명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선우씨, 오늘은 우리 진우 보고 갈래요? 진우가 선우씨 엄청 좋아할 텐데."
명희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선우는 수줍은 듯 웃고 있는 명희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네, 좋아요."
선우는 조심스럽게 집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다세대 주택이지만 곳곳마다 명희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 생각하니 무엇 하나 허투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기자기한 갖가지 소품들이 꼼꼼한 그녀의 성품을 실감하게 했다. 온기가 느껴지는 말 그대로 따뜻하고 아늑한 집이다. 명희는 진우의 방문을 노크한 후 조용히 방문을 열어 보았다. 아쉽게도 진우는 쌕쌕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명희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문을 닫았다.
"죄송해요. 벌써 잠이 들었네요. 요즘 독감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아니에요.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죠."
선우는 용기를 내어 명희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달아나지 않고, 다가와 줘서 고마워요."
명희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행복이 얼마나 지속될런지 불안해졌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더더욱 그러했다. 순간 명희는 깨달았다. 지난 몇년간 고대했던 나의 계획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