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잠 (10)

by 드루리

진우의 이야기 13


냄비 안에 한가득 물을 부었다. 잠시 물러서서 물이 끓기를 기다린다. 한참을 끓는 냄비안에 조심스레 김치를 집어 넣는다. 손으로 싱크대 위를 더듬어 보니 엄마가 준비해 두신 파와 마늘이 먹기 좋게 정돈되어 있다. 나는 손대중으로 대충 양을 가늠해 본 후 조심스레 냄비안에 파를 집어 넣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걸. 스스로가 대견스럽다. 이까짓 것도 못한다면 사람도 아니지. 참, 그러고 보니 냉장고안에 두부가 있다고 했는데. 쓸데없는 오기가 생긴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얼른 냉장고 문을 열어 두부를 찾았다. 그러나 구석구석 손을 집어 넣어 봐도 보이지 않는 물건을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쨍그랑 소리와 함께 뭐가 들어있었던 건지 알 수도 없는 음식 그릇들이 떨어져 발밑에서 깨져 버렸다. 이런, 큰일이다. 잠깐의 탄식을 내뱉은 나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로 바닥에 흐트러진 음식물을 치우기 위해 발버둥쳤다. 말이 쉽지, 경험해 보지 않은 이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얼마나 씨름을 했는지 내 몸은 그 짧은 시간 안에 온갖 음식물들로 뒤범벅이 되어 버렸다. 끓는 냄비에 쏟아진 음식물, 그제서야 나는 당장 밥을 먹는 것부터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는 현실을 맞딱뜨렸다. 조금전까지 뿌듯해하던 스스로가 이보다 더 우습게 느껴질 수 있을까.


"진우야, 괜찮아?"

"어.. 엄마."


나는 엄마가 부엌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가까스로 휠체어에 매달려 있던 나를 엄마가 다급히 일으켜 세웠다. 며칠 전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이토록 나약하고 어설픈 모습을 당신께 보여 드렸으니 엄마를 볼 면목이 없다. 만약 엄마가 나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다. 그러나 엄마는 풀이 죽은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시작이잖니."


기운을 내라는 엄마의 말에 다시 한번 도전을 해 볼테다. 그래, 이제 시작일 뿐이잖아.


진우의 이야기 14


나는 요리를 하기 전, 부엌의 동선부터 면밀히 체크하기 시작했다. 싱크대 왼편에 가스렌지가 있고 오른편엔 각종 그릇과 냄비가 올려져 있다. 머리 위 찬장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하부장만 신경쓰면 된다. 싱크대를 돌아 나오면 오른편에 냉장고가 있고 그 옆에는 식탁이 놓여 있다. 시계방향으로 돌아나가는 동선을 따라가면 된다. 나는 그릇을 하나하나 만져보며 종류별로 머릿속에 정돈을 했다. 나에겐 손으로 느끼는 감촉이 곧 눈으로 보는 시선이다. 손끝에 닿는 감촉으로 모든 것을 확인해야만 한다. 냉장고 안의 음식재료들 역시 허투로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손으로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 한번에 그치지 않고 두번,세번..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세번,네번 반복하며 내용물을 파악했다.

'지글지글' 끓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나는 국자를 들어 냄비안을 휘휘 젓고 난 후 조심스레 국물을 입안으로 가져갔다. 얼큰한 된장냄새가 혀끝을 맴돈다. 맛있다. 정말이다. 내가 직접 요리를 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나쁘지 않은 맛이다. 내 평생 처음으로 만들어 본 된장찌개 덕분에 나는 얼마나 맛있게 식사를 했는지 모른다. 참, 엄마에게 줄 찌개를 남겨둬야 하는데. 나는 그제서야 냄비안에 남아 있는 찌개를 한 아름 빈 그릇에 옮겨 담았다. 엄마가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다. 엄마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1시간, 2시간.. 가는 시간과 함께 된장찌개도 조용히 식어간다. "10시!" 매시 정각마다 시간을 소리로 알려주는 핸드폰이 또 한번 울렸다. 벌써 10시가 넘었는데 엄마는 무슨 일이신지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나는 연거푸 엄마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지만 여전히 엄마는 응답이 없으셨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 없다. 그러지 않고선 이렇게 연락도 하지 않은 채 집에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내가 엄마를 생각하는 것과 당신이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정도의 차이는 몇곱절이나 될 것이다. 그런 엄마가 아무런 이유없이 나를 이렇게 방치할 리가 없다. 엄마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텐데..


진우의 이야기 15


짹짹 새가 우는 소리와 함께 햇빛이 내 얼굴을 환하게 비추고 나서야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지난 밤 나는 엄마를 기다리다 휠체어에 몸을 파묻은 채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엄마가 집에 돌아 오셨는지부터 확인했다.


"엄마, 엄마 왔어요? 대답 좀 해 봐요."


애석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의 방과 거실 곳곳을 돌아다녀도 엄마가 지난 밤 집에 다녀가신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외박을 하고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112에 신고라도 해야 하나. 온갖 불길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저어 놓았다. 사람이 한가지 생각에 너무 깊게 빠지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 용기를 내고 힘찬 미래를 구상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의 나는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만큼이나 엄마는 내 인생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엄마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신고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엄마는 다 큰 성인이 아니던가. 단 하루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이 실종신고를 받아줄 리도 만무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침이 가고 낮이 가고 저녁이 될 때까지 하염없이 시간은 흘렀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어서 엄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10시!" 또다시 핸드폰 알람이 밤 10시를 가리켰다. 안 그래도 적막한 집이었는데 엄마마저 없다고 생각하니 세상 모든 것이 침묵에 빠져버린 듯 했다. 그 때였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무언가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현관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사고가 있은 이후, 엄마의 도움없이 온전히 내 힘만으로 실내를 벗어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마, 엄마에요?"


잘못 들었던 것일까. 현관밖에선 쌩하는 바람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한숨을 내쉬고 돌아서려는 그 순간 휠체어의 뒷바퀴가 한쪽으로 크게 들리더니 나는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현관의 계단을 미처 생각지 못한 내 실수였다. 콰당 소리를 내며 머리를 크게 부딪힌 나는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나는 젖먹던 힘을 다해 휠체어를 바로 세우려 노력했다. 그러나 혼자만의 힘으론 도저히 역부족이다. 도움을 요청할 만한 곳도, 도움을 요청할 힘도 나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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