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잠 (11)

by 드루리

요즘 들어 찰리는 명희와의 만남이 잦아졌다. 명희가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찰리는 그녀의 숨결을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좀 더 가까이, 좀 더 오래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찰리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당장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한 방법은 결국 아들의 치료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었다. 연구결과가 나오기까지 아직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며 향후에도 어떤 방향으로 흘러 가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찰리는 좀 더 그녀를 붙잡아 두기 위한 수단으로 그것을 적극 활용하였다. 오늘도 찰리는 아들에 대한 치료를 명분으로 명희를 만난다. 단, 명희만 그렇게 알고 있을 뿐 찰리는 그녀와의 만남 그 자체가 오늘의 목적이었다.


저 멀리서 단정한 원피스를 입은 명희가 식당문을 열고 찰리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마중했다. 단정히 빗은 머리와 과하지는 않지만 수줍은 듯 엷은 화장에 감춰진 미소는 그녀 역시 자신을 만나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였음을 인지하게 했다. 찰리는 그녀와 함께 이 공간에 같이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승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이렇게 급속도로 한 곳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일까. 찰리는 예전에는 미쳐 알지 못했던 이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찰리는 짐짓 무게를 잡고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박사님."


자리에 앉은 후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몇 번이나 연습을 했음에도 찰리는 가까이에서 그녀를 보자마자 말문이 막히는 스스로가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런 눈치를 챈 듯 명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사무실이 아니라 이런 곳에서 뵙자고 하셨을까요?"

"하하, 공적인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답답한 사무실보다는 이런 곳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찰리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바보처럼 보이지 않아야 할 텐데. 다행히 밥을 먹고 와인을 마시는 동안 찰리는 긴장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


"내일모레가 크리스마스인데 박사님은 별 다른 계획은 없으신가요? 아무래도 연구 때문에 휴일을 보낼 시간도 없으시겠죠?"

"아닙니다. 연구는 하더라도 휴일에는 쉬어야죠. 더군다나 크리스마스인데.. 그치만 제겐 크리스마스가 그저 쉬는 날일뿐 전혀 의미가 없군요.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아서 말이죠. 혼자 사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그게 참, 무뎌져 버린 것 같아요. 남들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라고 하지만 그건 마치 나와는 전혀 관계 없는 세상인 것 같은.. 내 것이 아닌 얘기처럼 말이죠."


찰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명희의 얼굴을 슬쩍 쳐다 보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주저리 말이 많아졌는지 모르겠다.


"이거 봐라. 내가 참 주책맞은 소리나 하고 있군요."


찰리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명희는 찰리의 얼굴을 넌지시 쳐다 보았다. 순간, 명희는 찰리의 마음에 뼛속까지 깊게 드리워진 그늘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 세상에 작은 아픔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찰리에게서 느껴지는 쓸쓸함은 명희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명희씨는 아들과 함께 휴일을 보내시나요? 아픈 아들을 챙기느라 고생이 많겠군요."

"네. 그치만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없이 모자랍니다. 전 제가 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어떤 측면에선 아드님이 부럽기도 하네요. 이런 좋은 엄마를 곁에 두고 있으니.."


찰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또 한번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명희와 함께할 때마다 계속해서 어머니와 그녀를 비교하게 되는 본인이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평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오랫동안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찰리는 불현듯 그녀의 남편에 대해 궁금해졌다. 남편이 누구인지가 궁금했던 것이 아니라 과연 명희가 어떤 사람과 사랑을 나누었는지 그게 알고 싶어졌다.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결혼을 했는지 어떻게 사별을 했으며 지금은 남편에 대한 마음이 어떠한지.. 찰리는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호.. 혹시 남편과는 어떻게 사별을 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그건"


순간 명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명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죽은 남편에 대한 짧은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감정이 북받쳐 오르다니. 찰리는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했구나 싶어 마음이 복잡해졌다.


"미안합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되요. 내가 괜한 얘기를 꺼냈나 보군요."

"아, 아니에요. 그냥, 남편에 대한 생각은 하고 싶지가 않아서요. 워낙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충분히 이해합니다. 앞으론 즐겁고 행복한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하얀 눈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 함박눈이었다. 불과 1,2시간만에 눈이 제법 쌓였다.


"이런, 조금 있으면 길이 꽤나 미끄러워 지겠어요."


찰리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줄 명분이 생겨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명희는 어린 아이처럼 맑은 눈으로 내리는 함박눈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명희씨는 눈을 좋아하시는군요."


명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소복히 쌓여 있는 눈을 작은 손으로 뭉쳤다.


"이것 보세요. 꼭 솜사탕 같지 않나요?"


솜사탕, 어머니가 하얀 눈을 볼 때면 늘 하던 말이다. 아이와 같은 명희의 환한 미소는 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얼어붙었던 남자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버리는 것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다. 찰리는 북받쳐 오르는 자신의 감정을 도저히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를 와락 껴안아 버렸다.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정말 내가 이래도 되는 건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뒷수습은 나중에 하면 된다. 그냥 이 순간만큼은 가슴이 시키는대로 할 뿐이다. 그러나 기우였다. 잠시 당황하던 명희는 이내 찰리의 등을 살며시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를 품안에 꼭 안았다. 마치 엄마가 어린 자식을 꼭 껴안아 주듯이..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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