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잠 (12)

by 드루리

진우의 이야기 16


북적북적 사람들의 말소리가 파도소리와 함께 들렸다. 조심스레 감은 눈을 뜨자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가 내 앞에 펼쳐졌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파라솔 밑에서 태양을 피한채 하얀 백사장에 누워 있었다.


"진우야, 이제 일어났어?"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나는 나를 향해 웃음짓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누구지? 낯이 익은데. 그래! 지수다. 내가 사고를 당하기 1년여전 애틋한 감정을 함께 나누었던 그녀가 내 곁에 있다. 그녀는 여전히 소중한 내 여자친구다. 아니, 예전보다 서로를 더 깊이 걱정하며 서로의 고민까지 함께 공유하는 사랑하는 연인관계임에 틀림이 없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나 또한 지난 1년여간 그녀의 손을 단 한번도 놓은 적이 없다.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넓고 하얀 백사장을 마음껏 뛰어 다녔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 모습이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도 같다.

"진우야, 어서 이리 와. 같이 수영하자."


지수는 자신이 돌고래라도 된 것처럼 저 멀리 수평선까지 힘차게 가냘픈 몸을 내던졌다.


"으.. 응, 그래."


나는 싫은 척 애써 고개를 돌렸으나 정작 마음은 이미 푸른 바다안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수는 어느새 안전요원들이 설치한 부표를 넘어 저 멀리 바위섬까지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환한 미소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순간이 꿈만 같다.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그동안 이런 감정을 모른채 살았을까. 이렇게 소중한 사람을 왜 잊고 살았을까. 그런데 예사롭지 않은 그녀의 팔동작이 평소와 달라 불안감이 스쳤다. 무언가 불편한 듯 크게 팔을 휘두르던 지수는 이내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울부지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를 향한 그녀의 손짓이 자신을 구해 달라는 절박한 구조요청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팠던 다리를 뒤로 하고 지수가 있는 험한 바다속으로 몸을 던졌다. 자각하는 바와 달리 내 몸은 믿기 어려울만큼 가벼웠고 지수를 향한 내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나는 힘차게 발을 움직이며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근처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잽싸게 몸을 이동하여 마침내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아뿔싸! 그 순간 가슴팍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바위를 피해 그녀를 낚아채려는 순간 내 가슴이 튀어나온 돌바위에 쿵 부딪히고 만 것이다. 가슴에서 철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건 이미 중요하지가 않았다.


"지수야, 지수야. 눈 좀 떠 봐. 괜찮아?"


희미하게 눈을 뜬 지수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 고마워. 진우야. 어떡해. 나 때문에 다친 거 아냐?"

"괜찮아. 내 걱정은 하지 마. 정말 괜찮은 거야?"


힘겹게 내 팔을 부여잡던 지수는 어느새 정신을 잃고 말았다. 곧이어 해상안전요원들이 줄지어 나에게 달려왔다. 그제서야 안심을 한 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진우의 이야기 17


정신을 차리자 이번에는 정말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그러나 환하게 밝은 꿈속 세계와 달리 안타깝게도 깜깜한 어둠만이 나를 맞이할 뿐이다. 꿈이었구나. 지난 1년간 잊고 살았던 지수의 꿈이라니. 참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갑자기 온몸을 감싸는 한기가 엄습했다. 나는 차디찬 현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내가 왜 이 곳에 쓰러져 있는지 깨닫는 데에도 한참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엄마는 지난 밤에도 들어오시지 않은 모양이다. 이틀째 엄마가 없는 밤을 보내다니.. 오늘의 나에겐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하는 걱정보다 내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것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이 먼저였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해도 지금처럼 힘든 몸 상태에서는 나 자신을 우선시할 수 밖에 없다. 설령 그게 엄마에 대한 애절함이라 할지라도. 뒤집힌 휠체어를 바로 세울 힘이 나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조금씩 현관문쪽으로 기어갔다. 다리에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막막한 삶일지라도 조금이나마 더 연명하기 위해 나는 가까스로 현관문을 밀어 방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정말 죽지 않으려고 젖먹던 힘까지 짜 내었다. 극한의 순간에 발휘되는 인간의 초인적인 힘이란 이토록 위대한 것이다. 그렇다. 나는 살기 위해 이를 꽉 물었고 마침내 깨달았다. 몸과 마음이 고통 속에 있더라도, 몇번이나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을 해 봐도 나는 여전히 이 비루한 삶을 지속하고 싶었던 것이다.

가까스로 침대 위로 몸을 누인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나왔다. 지난 며칠간의 희망찬 다짐이 이토록 허무하게 느껴질 수가 있을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흐트러졌던 내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엄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왜 이렇게 돌아오지 않는 거지? 애석하게도 어제와 같은 엄마에 대한 진심어린 걱정은 좀체 되살아나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안중에 없나 보다. 내가 당신의 삶에 짐이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원망의 시간만 되풀이될 뿐이다. 그런데 머릿속에 그려본 엄마의 얼굴은 어느새 지수의 그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지수의 얼굴이 왜 아른거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한 꿈이다. 왜 갑자기 지수의 꿈을 꾼 것일까? 며칠 전 지수에게 섣부른 전화를 걸었던 것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던 것일까? 사고가 난 이후로 그녀를 생각한 적도, 그리워 한적도 단 한번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러던 중 나는 무의식중에 내 가슴으로 손을 뻗었다. 어라. 꿈에서 느꼈던 가슴팍의 그 흉터자국이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 아닌가. 분명 예전의 나에겐 그런 상처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한 기분이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고 나니 조금씩 그 날의 일상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그려왔던 그녀와의 여행, 같이 밥을 먹고 수영을 하며 밤바다를 산책하고 달을 보고 소원을 빌었던 그 날의 맹세가 불현듯 되살아났다. 우리의 사랑은 영원할 것이라며 서로를 꼭 껴안았다. 머릿속에 생생하게 재현되는 이 꿈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침대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멍하니 누워만 있던 나는 마침내 깨달아 버렸다. 그건 꿈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사실을..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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