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선우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다이얼을 눌렀다. 여전히 그녀의 전화는 묵묵부답이다. 선우는 며칠째 연락이 없는 명희가 어디 아픈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녀는 꼬박꼬박 출근을 하는 듯 했다. 그래서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앞에서 그녀를 기다렸건만 어제도 명희는 바쁜 일이 있다며 애써 선우와의 만남을 거부했다. 지난 번 명희의 집을 방문했을 때 분명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오히려 그날 이후 명희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식어 버린 듯한 느낌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선우는 창밖에서 비치는 희미한 불빛에만 의지한 채 아무도 없는 집안을 둘러 보았다.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은 물론이고 그녀가 사용하던 컵과 식기, 화장품과 의류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에는 행복했던 지난 날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다. 아내가 죽은 이후 여전히 이 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선우의 괜한 고집때문일런지 모른다. 선우는 만약 이 집을 떠나게 된다면 그 때는 정말 아내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미련이라고 해도 좋고 집착이라고 해도 좋다.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는 거라고 하지 않던가. 만약 나에게 아내를 대신할 누군가가 생긴다면 그 때는 두번 다시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으리라. 예전에는 그러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떠나 보내준다면 그건 아내 또한 바라는 일일 것이다. 그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다. 나에게도 새 삶을 살아갈 원동력이 생긴 것이라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데 그게 늦은 밤 외로운 한 남자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선우는 마음이 공허해졌다. 지난 1년여간 한번도 입에 대지 않았던 소주를 벌써 두 병째 비우고 있다. 술의 기운을 빌리지 않고서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얼큰하게 취해 버린 선우는 무작정 얇은 외투 하나만을 걸치고 터벅터벅 집을 나섰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발걸음을 명희의 집앞으로 향했다. 사실 어제도 선우는 명희의 집앞을 서성였다. 며칠째 연락이 되지 않는 그녀에게 분명 말 못할 고민거리가 생겼기 때문일거라 생각했다. 아들의 몸상태가 악화된 것일까? 나를 믿고 고민을 털어 놓아준다면 좋을 텐데.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지만 선우는 그녀의 집 초인종을 끝끝내 누르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 골목길이 때로는 무섭게 느껴지거든요.'
명희의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 하다. 여전히 골목길옆 가로등은 온전한 불빛을 발산하지 못했다. 공무원들은 저거 하나 제대로 수리하지 못하고 뭐하는 것일까. 선우는 애꿎은 전봇대만 발로 차며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어두운 골목길을 나섰다. 바로 그 때, 누군가의 차가 조용히 명희의 집앞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차안에서 한쌍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마워요. 데려다 줘서. 여기에요."
"그렇군요. 예쁜 집이군요. 오늘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먼 발치에서 지켜본 것 뿐이지만 선우는 여성의 정체가 명희임을 단번에 알아 차렸다. 그리고 저 남자, 어디서 본 듯 낯이 익었다. 맞아. 얼마전 명희와 함께 강연회장에서 보았던 세계적인 과학자 찰리 강이라는 바로 그 사람이다. 선우는 명희가 아들의 치료를 위해 찰리에게 다가가려 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선우에게도 고백하고 도움을 청했다.
"아들이 제때 치료받을 수 있도록 어떤 기회라도 잡고 싶어요."
사실 선우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찰리의 연구가 이렇게나 낱낱이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는 상황에서 개인이 단지 후원을 많이 한다고 해서, 개인적인 환심을 산다고 해서 아무런 원칙없이 먼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일까.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아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 보고 싶다는 명희의 마음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자기 자식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존재이니까. 게다가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아니던가. 선우는 어떻게든 더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몇번이나 그녀와 함께 찰리가 가는 곳을 따라 다녔다. 사실 강연장에서 발언권을 얻고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일이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몇 번이나 시행착오를 겪고 난관을 돌파한 끝에 기적과 같이 명희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찰리를 만나 아들의 치료를 약속받았다며 환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선우는 조심스럽게 숨을 죽이고는 명희와 찰리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오늘은 너무 시간이 늦어서 그만 가보겠습니다. 다음번에는 꼭 차 한잔 주세요."
"네, 그럴게요."
명희가 수줍은 듯 대답하자 찰리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볼에 키스를 했다. 명희는 분명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선우의 심장이 갑자기 쿵쾅대기 시작했다. 선우는 손안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자신도 모르게 부서질세라 꼭 쥐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 왜 내가 이런 광경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가. 그녀가 원하던 것이 결국 이런 것이었나. 이윽고 찰리의 자동차가 떠난 후, 홀로 남은 명희가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선우는 충동적으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깜짝 놀란 명희는 선우를 보고 당황한 듯 했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선우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미안해요. 저 오늘은 피곤해서 먼저 들어갈게요."
그 순간 취기가 머리끝까지 올라 감정이 뒤엉켜 버린 선우가 과격하게 명희의 팔을 낚아챘다.
"이대로 그냥 들어간다고요? 어떻게 된 건지 뭐라도 설명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명희는 잠시 선우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린 후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언제부터 계신 건지 모르겠지만 선우씨가 본 그대로에요."
선우는 갑자기 그녀에 대한 원망과 실망, 배신감이 머리속에 가득 차 버렸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마신 술기운이 순간적으로 자신의 본성을 지배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이런 거였어요? 아들의 치료는 그저 핑계일 뿐이고 사실은 저 사람에게 몸도 마음도 다 줘 버리겠다는 거에요? 최소한 나에게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선우는 자신이 실수를 한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그녀의 진심을 더 빨리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런 게 아니라고, 내가 오해한 거라고 되려 나에게 화를 내 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선우의 어그러진 마음을 더욱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몰고 갔다.
"맞아요. 선우씨 말이. 몇 번을 만나다 보니까 저 사람이 좋아졌어요. 돈도 많고 명예도 높은 사람이 보잘 것 없는 내가 좋다는데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거에요? 그동안 아픈 아들때문에 고생만 하고 살았는데 나도 이제 돈 많은 사람 만나서 팔자 펴고 싶어요. 왜요? 그게 어때서요."
그녀의 말이 마치 차가운 바람처럼 선우의 가슴을 후려 쳤다. 순간적으로 쏟아내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명희는 선우를 지나쳐 말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서 있던 선우는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세찬 바람이 황량한 스스로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선우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밤새 터벅터벅 무작정 걷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