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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하 Jun 18. 2024

훔치고 싶은 엄마, 마릴라 아주머니와 J 아주머니

혼독함공독서일지

     

“너를 다른 홈스테이에 보내고 마음이 편할 것 같지 않아. 어린 네가 혹시라도 다른 집에서 눈칫밥 먹을 생각하니 안 되겠어. 네가 괜찮다면 여기서 우리와 함께 있어도 좋아.”     


아, J 아주머니로부터 이런 소식을 듣게 되다니. 꿈을 꾸었나 했는데 현실입니다. 제가 바라던 소망이 한 번 더 이루어졌습니다.      


J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R 아저씨 감사합니다. L&B 고마워.          


오드리는 유학중입니다. 지금 홈스테이와는 한 학기만 지내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유학 생활이 처음인 어린 오드리가 짧은 기간에 새 홈스테이로 옮겨 적응해야 하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지금 홈스테이보다 더 나은 곳을 만난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홈스테이에 한 학기만 더 머물 수 있는지 부탁했고 천만다행으로 두 학기까지 허락해주었습니다. 더는 부탁할 염치가 없어 두 학기가 끝나는 7월에 홈스테이를 옮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홈스테이에서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두 학기 더 머물러도 좋다는.     

 

이유는, 오드리가 다른 홈스테이에서 눈치 보며 생활할 것이, 남의 집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 마음에 쓰였던 겁니다. 아, 함께 지낸 날도 정이라고, 여자아이가 눈에 밟혔던 겁니다.      


감사와 기쁨의 순간, 저는 빨강머리 앤 속 마릴라 아주머니와 매튜 아저씨가 떠올랐습니다.     


『마릴라는 앤을 보았다. 창백해져서 입도 뻥끗 못하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앤은 도망쳐 나온 덫에 또다시 걸려든 무기력한 어린 짐승처럼 서글펴 보였다. 그냥 모른 체했다가는 그 간절한 표정이 죽는 날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마릴라는 블루엣 부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수성 넘치고 '들뜨기 잘하는' 이 아이를 저런 여자한테 보낸다고! 아니,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매튜와 마릴라는 집안일을 거들 남자아이를 보육원에서 데려오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착오로 여자아이인 빨강머리 앤이 왔고, 이 때문에 다시 돌려보내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때 까다롭고 예민한 이웃 부인이 앤을 데려가려고 하자, 마음이 쓰입니다. 절망과 슬픔에 찬 앤의 눈을 보며 마릴라는 다시 앤을 데리고 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앤에게는 마릴라와 매튜라는 가족이 생겼습니다.      


오늘 읽은 빨강머리 앤의 주인공은 단연 마릴라 아주머니와 매튜 아저씨입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앤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당당이에게 J와 R은 마릴라며 매튜입니다. 지금 J와 R이 당당이를 돕고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말이지요. 그래서 감사합니다.      


지금 오드리가 지내는 홈스테이는 어릴 적 내가 꿈꾸던 그야말로 단란한 가정입니다. 따뜻하고 유쾌한 아빠 R, 단호하지만 다정한 엄마 J, 오드리와 MBTI가 정반대여서 더 끌리는 동급생 L(앤과 다이애나처럼), 천둥과 번개를 동반했지만 사랑스러운 재간둥이 B(앤과 길버트처럼). 언제나 웃음과 행복이 가득하진 않습니다. 폭풍 후 바다는 다시 잔잔해지듯 간간이 난리 통 속 가정은 부모의 단단한 믿음과 지지로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리고 평화롭게 안전하게 단란한 가정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오드리가 머뭅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은 행복했었나요? 글쎄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오드리의 유학 시절은 분명 여기보다 행복했으면 하고 바랍니다.        

  

P.S

오늘 비행기표를 끊었습니다. 당당이를 보러 뉴질랜드에 다녀올 예정입니다. 그들은 내가 당당이와 내가 머물 수 있도록 또 허락해주었습니다. 나는 오늘도 맥아더 장군의 내 다섯 자녀를 위한 기도문을 읽으며 그들의 친절과 배려에 답합니다.   

   

P.S

일 보러 갔다가 잠시 들른 곳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가방 안에 넣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이었지만, 훔치고 싶은 욕망을 버렸습니다. 좋은 책은 모두가 보아야 하기에 눈 딱 감고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 빨강머리앤 노랑 표지에서 주인공은 단연 마릴라 아주머니였습니다. 처음 빨강머리앤을 만났을 때는 앤과 다이애나와 길버트가 보였습니다. 엄마가 되면서 나는 레이첼 부인과 마릴라 아주머니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최근 꽃과 나무와 공기와 햇살을 맞이하는 나를 보았습니다. 읽을 때마다 먼저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내가 달라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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