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에디톨로지스트, 삶도 글도 편집입니다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13

by 김선하

1. 사는 동안,

이 악물고 기 쓰고 살았습니다. 왜 그렇게 사는지는 잘 모르고 그냥 열심히 살았습니다. 돌부리에 넘어지는 날에도 잠시 쉬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유도 목표도 없이 내달렸습니다.


2. 어서 일어나!

일보후퇴, 양자택일, 선택약정. 뭐 이런 것이 있던데 나와는 상관없는 말이었습니다. 누가 뭐라거나 말거나 살다 보니 살아졌고 이만큼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본 결과, 뒤돌아보니, 과정은 고되었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은 인생입니다. 하기사 이제 반 평생 살았으니 더 살아봐야 알겠지요.

3. 방향키를 잡고,

내 삶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편집된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은 창조였을 것이고, 과거의 나를 아는 사람은 발전이었을 것이며, 나의 겉모습이나 잠깐 본 사람은 포장이었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나의 삶은 수정되고 편집된 창조의 결과입니다.


4. 애썼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사는 동안 애썼다고 합니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은 고생 없이 잘 살았다고 합니다. 나는 산으로 강으로 널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동서남북 구분 없이 헤매는 동안, 산을 오르는 그 과정이 길고 험했지만, 사이사이 그늘도 만났고, 단물도 마셨고, 험한 산새를 지나 정상도 가보았습니다. 오를 때는 모르고 올랐습니다. 내려와 보니 정상에도 올라본 사람이 되었고, 다시 평지를 유유히 걷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5. 나의 글이 나의 삶

과거, 나의 글도 그랬습니다. 지금, 나의 글도 그렇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기분이 좋아서 끄적입니다. 하루를 마친 나의 다이어리는 행복과 만족의 이모티로 가득했으며 예쁘고 고마운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때로는 기분 나쁘고 우울한 날도 화가 나는 날도 있었습니다. 실수와 잘못, 후회한 날들은 뉘우침과 반성의 시간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울고 웃고 타이르고 다그치면서 채워진 글은 서랍장 한 칸에 쑤셔 박혔습니다. 이제는 그런 쪽지나 메모 대신 글이라는 것을 자판기로 두드리며 A4용지에 채웁니다. 또 다른 여정의 기록이고, 역사이고, 나란 사람의 결과물이 되어 노란 파일을 빨강 우체통으로 알고 채워 넣습니다.

그러다가 하나의 주제로 글을 모을 일이 생기면 그 기록 가운데 그룹을 지어 모으고 나누고 다시 붙이고 오립니다. 어떤 기회가 오면 파일 속 글 중에서 다시 고르고 수정하고 편집해 하나의 큰 덩어리를 만들어 냅니다.

6. 기획주의자

내가 아는 코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작부터 끝까지, 철저한 기획주의자입니다. 일이 터지면 상황을 주시하고 살핍니다. 문제가 되는 것을 찾아냅니다.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원인을 찾고 현 상황에서 해결 방안을 모색합니다.


주먹구구식은 안됩니다. 문제를 펼쳐놓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왜 일어났는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왜 해결해야 하는가, 등등. 그렇게 스텝을 밟아 나아가듯 글을 쓰기 전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읽을 것인지 주도면밀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단순 명료하게 누구나 한눈에 보고 이해하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그의 기획은 이러합니다.

기획된 결과물 한 장만 있으면 다음 글쓰기는 한결 수월해집니다. 기획안에 목적이 플랜이 방안이 있으니 그날그날 제시어 하나만 엮으면 삶이든 글이든 대체로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질과 양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작이 덜 힘들다는 것이지요.

일에는 순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기획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다 보면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어집니다. 어떤 것은 괄호를 사용하고 제곱근도 올려야 할 때가 옵니다. 기획에서 시작했지만 과정은 편집, 에디톨로지입니다. 그 기획주의자는 내 시작을 잘 이끌어 주었습니다. 이제 그 끝은 내가 해보려고 합니다. 편집주의자인 내 방식대로 말입니다.


7. 편집주의자 말고 에디톨로지스트

나는 글을 쓰기보다는 편집한다고 표현합니다. 과거의 내 글은 과거에 내 글쓰기를 닮았었고, 변한 나는 나의 새로운 글쓰기를 닮아갑니다. 삶과 글은 남이 아닌 내가 주인입니다. 나는 내 안에 있습니다. 남이 나를 평가하도록 두지 않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나를 중심으로 써나갑니다. 타인을 의식해서 타인에 맞추는 글은 쓰지 않습니다. 내가 행한 것은 내가 평가합니다. 그리고 내던집니다. 이제부터 평가는 타인, 당신의 몫입니다.


김정운 책 <에디톨로지- 창조는 편집이다>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어디서 뚝 떨어졌거나 없던 것이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것 혹은 해야 하는 것을 꾸준히 하다 보면 양과 질에서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발전하는 것이지요. 그러는 사이 필요한 부분과 중요한 부분을 연결 짓고 다듬으며 나아갑니다. 그러면 그것이 한 개인의 삶이고 창조입니다.


방금 전보다, 어제보다, 과거보다 나아진 편집된 창조입니다. 나는 그렇게 성장하는 사람, 하나에서 둘셋을 이끌어내는 사람.


나는 에디톨로지스트가 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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