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데 사치를 부립니다 (1)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15
1.
나는 예쁜 것을 좋아합니다. 여자니까?여자니까!
이런 말을 하면 화장을 하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 멋스럽게 옷을 입고 꾸미기를 좋아하겠거니 생각하겠지요. 나는 나 자체를 꾸미기보다는 내 환경을 꾸미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2.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가면, 의류나 화장품보다는 인테리어나 소품에 눈이 먼저 갑니다. 그렇다고해서 집 안 인테리어 공사를 하거나 마음에 드는 소품을 사들여 장식하지는 않습니다.
집에 정기적으로 들이는 물건이라면 거실 한 모퉁이 ‘푸밀라 홈 미니 가든’을 채우는 식물 정도 입니다.
요리만큼 주방용품과 그릇에 관심이 있습니다. 물론 관심만 있을 뿐입니다. 주방에는 양팔 너비의 찬장 하나 뿐이니 예쁘다고 필요하다고 마구 사들이지 않습니다.
물건을 고르고 사는 그 순간은 좋습니다. 그러나 막상 집안에 들이면 생각만큼 많이 사용하지 않고, 그 물건이 주는 만족감에 비해 좁아진 공간의 아쉬움이 큽니다. 그래서 섣불리 물건을 내 집에 들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불편하고 복잡할 때, 소유욕이나 쇼핑 욕구가 발동하기보다는 정리 정돈하며 집 안 물건을 버리는 편입니다.
3.
사는 것 자체에 재미를 못 붙였으니 친구와 쇼핑도 그닥 즐겁지 않습니다. 친구들은 백화점에 들어서면 물 만나 고기떼처럼 신발, 가방, 옷에 각종 액세서리까지 선호하는 브랜드와 각종 샵을 섭렵합니다. 이내 전용 탈의실이 된 듯 여러 벌을 입어보고 거울에 비추어보느라 바쁩니다. 그들 가운데 나는 먼 산 바라보듯 나는 왜 여기에? 하며 친구들이 인형놀이 옷 갈아입히기 놀이에 시들해질 때만 기다립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쇼핑백을 들고 매장을 나오며 밥 먹어야지? 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잃었던 웃음을 되찾습니다. 나는 옷이나 액세서리 사는 것보다 먹는 것이 행복하니, 식비나 외식에 용돈 지출이 더 나갑니다.
4.
이런 나도 쓰는 곳이 있습니다. 나만의 공간, 그곳입니다. 내공간, 일터 내부는 빨강 머리 앤 덕후 생활의 연장선입니다. 실내는 앤 포스터와 퍼즐로, 책장 사이사이는 앤 도서와 굿즈로 채웁니다. 세 개의 벽은 유리창으로 하나만 가벽입니다. 벽 하나를 차지할 만한 액자를 걸고 그 위에는 엽서나 사진을 붙입니다. 창문은 모두 커튼을 사용해 오래된 상가의 흔적을 가려둡니다. 그리고 테이블은 내가 좋아하는 길이와 높이 사이즈를 별도로 제작해서 모은 쌈지돈을 이곳에 들입니다.
일 할 때는 강의실이라 부르지만, 개인적인 일 - 쓰기와 읽기 - 을 할 때는 아지트라 부릅니다. 어찌보면 아지트를 꾸미는 것이 취미생활일 수 있겠습니다.
최근 장 스탠드 하나를 들였습니다. 그 조명에서 나온 빛이 앤 포스터가 있는 한쪽 벽면을 비춥니다. 동네 책방에 갔다가 전체 인테리어에 비해 느껴지는 따스함이 주황빛 전구를 끼운 스탠드에 있음을 힌트로 얻어 그날 집으로 오면서 주문했습니다.
5.
글 쓰는 사람은 예민합니다. 예민해야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글 쓰는 사람은 좀 예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섬세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주면 좋겠습니다. 글을 쓰는 환경, 글을 대하는 자세가 보통의 업무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글 쓰는 일이 예술이고 창조활동이라면 더욱이 환경과 자세에 섬세한 손길이 닿아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지트 문을 열었을 때, 채도가 낮은 스탠드 안에서 새어 나와 벽에 반사된 주황빛이 나를 환대합니다. 그 빛에 드리운 앤 포스터 너머로 앤과 다이에나가 웃으며 춤을 춥니다. 이런 환대를 위해 아지트에 물건 하나 들였던 것입니다.
오늘도 나는 이 사치스런 나만의 공간 '아지트'에서 글쓰는 사치를 부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