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데 사치를 부립니다 (2)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17

by 김선하


1.

내가 용돈을 쓰는 영역은 분명합니다. 취미와 직결됩니다. 오래전부터 아주 대상이 바뀌긴 했지만 끝없는 적극적인 덕후였습니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2년 내내 홍콩 배우 유덕화를 좋아했습니다. 그가 나오는 영화 개봉 날을 학교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빼먹는 날입니다. 유덕화 영화가 나오면 첫 개봉날, 영화필름이 돌아가는 영상실에서 가까운 뒷자리에 앉습니다. 영화가 상영 동안 영상실 문은 두어 번 열렸다 닫혔다 하면서 필름 돌아가는 기계소리가 들립니다.


영화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영상실과 극장 입구와 거리가 있는 좌석에 앉아야 하지만 나는 영상실에서 새어 나오는 잡음과 소음을 배경으로 스크린을 관통할듯세심하게 뾰족한 콧날과 턱선을 가진 남자의 미장센을 즐깁니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날은 아이들에게 영화 이야기를 해줍니다. 내가 영화를 보는 자세이며, 유덕화 찐 팬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덕후의 한 예입니다.


2.

그때는 아이돌 굿즈라는 게 따로 없었습니다. 유명 연예인 책받침과 포켓용 사진 정도였지요. 문구점 입구에 책받침이 걸리는 족족 사들였습니다. 풀지도 않을 문제집을 사들인 이유는 뻔합니다. 문제집 한 권당 포켓 사진 하나가 사은품이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그가 나오는 기사가 있거나 브로마이드를 별책부록 혹은 사은품으로 준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그 달에는 그 많은 잡지를 사야 합니다. 덕분에 교실 사물함 위에는 청소년 권장 도서와 입시를 위한 필독서만큼 각종 잡지와 새 문제집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사진은 코팅하고, 브로마이드는 테이핑 하고, 포켓 사진은 따로 보물함을 만들어 보관했습니다. 친구들은 연예인 책받침을 수업 시간에 학용품으로 사용했지만, 나는 연필 자국이 베일까 모아두기만 할 뿐 절대 문구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유덕화 얼굴 손 하나 어디라도 훼손되는 것은 진정한 팬의 자세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3.

청소년 시절 나의 우상 유덕화를 위해 내 용돈은 얼마나 쓰였을까요? 금액으로 환산해 본 적은 없습니다. 계산적인 나지만 유덕화를 계산기 위에 올려 둘 수는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빵 사 먹을 돈은 없어도 유덕화 책받침은 사야 했고, 보충학습 문제집은 못 사더라도 유덕화 주연의 영화 입장권은 끊어야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4.

나는 변했을까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대상만 변했을 뿐 덕후 생활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자칭 타칭 나는 빨간 머리 앤의 여자아이 앤 ANNE 덕후입니다. 영어 원서를 포함한 각종 출판사의 앤 책 구매는 기본. 넷플릭스를 보게 된 계기도 빨간 머리 앤 시즌 3까지 여기서 단독 방영이었기 때문입니다. 서점에 책을 구매하러 가지만 결국 예상외 카드값을 지불하는 것은 계산대 위에 올라온 앤 굿즈 때문입니다. 주머니 여유가 생기면서부터는 같은 굿즈를 2개씩 삽니다. 하나는 소장용으로 서랍에 넣어두고, 하나는 평소 사용하려고 가방에 넣어 다닙니다.


내 삶이 즐거운 이유는 취미활동 덕분입니다. 취미인지 직업인지 경계 없는 이 몇 개 활동에 나는 적잖은 돈을 씁니다. 나에게 기쁨 주고 행복 주니 이 정도 씀씀이는 사치가 아니라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인생 2 막을 준비하는 나의 취미 중 하나는 책 읽기와 글쓰기입니다.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가요?


5.

글을 쓰는 것은 돈이 들지 않습니다. 집에 굴러다니는 노트나 이면지, 쪽지도 글쓰기에 충분한 도구가 됩니다. 여백 어디에나 그냥 쓰면 됩니다. 그렇게 쓴 글을 버리지만 않고 보관해 두면, 그것이 언제가 초고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글쓰기도 처음에는 포스트잇과 아이들이 쓰지 않는 노트에서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핸드폰 메모에 글을 써서 저장해 둡니다. 그리고 시간 내서 그 메모를 노트북 한글 파일에 옮겨와 글을 씁니다. 글은 비용이 들지 않는 글쓰기이며, 투자금 없는 개인 사업입니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단지 시간과 성실만은 꾸준히 출근시켜야 합니다.


6.

나는 글 쓰는 공간이 따로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학원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며 차 안에서 노트북에 글을 썼습니다. 가끔 카페에서 커피와 빵을 주문하고 글을 쓰는데 이만한 호사가 없습니다. 지금은 사무실에서 혼자 남아서 쓰거나, 거실 한쪽 구석에 책상을 들여와 그곳에서 글을 씁니다.


취미에서 직업으로 변환하는 지금 시점에서 글을 쓰는 근무처는 다소 비약합니다. 그래서 나의 글에 대한 예우를 차리고자, 사실은 나 기분 좋아지라고, 노트북 아래 빨간 머리 앤 노트북 패드를 깔고, 조명도 하나 사서 세웠습니다. 평소에는 아이들 책으로 가득하지만, 내 글을 쓰는 시간은 모든 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내 물건만 올립니다.


원고 전체 수정이 한 번씩 끝나면, 나는 그것을 프린트로 뽑아서 수정합니다. 사무실에서 나오는 이면지를 이용합니다. 가끔 내 글을 읽다가 페이지 순서가 잘못되어 다른 글을 읽어 흐름을 깨트리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반딧불에 글을 쓰듯 아끼고 아껴서 나는 글을 쓰고 수정합니다.


나는 글을 수정할 때, 쓴 원고를 화면으로 읽지 않고 프린트 한 종이 위 글을 읽습니다. 내 글쓰기 코치도 이와 같은 조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 내가 그의 조언을 따라 바꾼 것이 있다면 더는 이면지를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7.

내가 쓴 글을 내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누가 소중히 여겨줄까요? 자식이 그렇잖아요. 내가 애지중지 키우지 않는데 밖에 나가서 대우받고 존중받을 수 있을까요? 안에서 아끼고 사랑해야 밖에서도 그와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내 글은 내 자식입니다. 배 아파서 낳은 두 아이를 예쁘고 곱게 키우던 마음 그대로, 손가락 아파서 낳을 셋째, 넷째도 소중하게 보살피겠습니다.


빨강 머리 앤 패드 위에 올려진 내 글 담을 노트북도 깨끗이 닦고 키보드 먼지도 떨어냅니다. 예쁜 색색이 볼펜으로 한 단어 한 단어 고쳐갑니다.


나에게 행복과 위안을 주는 내 글에게, 나는 오늘도 사치를 부려 글 쓰는 호사를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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