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der Lily, 꽃의 관능을 읽을 때>
여행에서 눈여겨보는 것은 단연코 꽃과 풀과 나무이다. 식물전문가도 식물학자도 아니지만 모르는 식물을 만나면 더듬더듬 네이버 사진 검색 기능을 통해 그에 대해 공부해 본다.
거미 릴리 Spider Lily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꽃무릇(석산)을 뜻하는데, 말레이시아 여행 중 만난 이 흰 꽃 역시 거미 릴리라고 하는 걸 발견하고 괜스레 눈에 더 밟혔다.
길게 뻗어 늘어진 꽃잎이 거미를 연상시키면서 전형적인 꽃의 아름다움보다는 ‘거미’와 같은 기이한 형태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국에서도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자귀나무 꽃의 신비로운 자태를 보고 눈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있는데, 말레이시아에서도 같은 시기에 자귀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꽃잎이 이렇게 퇴화된 꽃들을 보면 살아남기 위해 전형성을 과감하게 버린 그들의 '악'바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수억 년 동안 진화의 과정을 그러니까 혹독한 세월의 필터를 거쳐 결국 이런 모양을 띄게 되는 것의 의미를 고고학자의 마음으로 가름해 본다. 그래서 어쩐지 그들의 독특한 형태 자체에서 어떤 연민이 느껴지는 것이다.
밤의 어둠 속에 희미하게 그러나 야성적인 꽃의 외침을 듣는다. 꽃의 관능을 새삼스럽게 헤아린다. 꽃의 학명도, 전해 내려 오는 꽃말도, 꽃의 특징도, 어쩌면 내 눈에 보이는 이 이미지 속 꽃의 관능에 녹아있지 않을까?
보이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적절한 거리에서 심혈을 기울여 카메라에 담아내는 행위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자면 그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