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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가 모차르트만 있는 줄 알았지? 명화 이야기❤

파견 예정 교환학생's 오스트리아 공부

by 민써니

최근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이라는 전시로 합스부르크 가문과 제국의 역사가 재조명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합스부르크제국은 수많은 예술과 음악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쟁쟁한 화가를 배출하고 키워낸 에스파냐와 달리, 독일어권은 '눈으로 즐기는 사람(=화가)'이 아닌 '귀로 즐기는 사람(=음악가)'이 대부분이라 미술 분야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는 듯 합니다. 그러나, 베르디의 오페라 <카를로스>,(프리드리히 실러 원작), 슈테판 츠바이크의 전기 <마리 앙투아네트>, 실베스터 르베이의 뮤지컬 <엘리자벳> 같은 걸작을 비롯해 회화 작품에서도 알브레히트 뒤러, 베첼리오 티치아노, 디에고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같은 천재들이 붓을 놀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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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최근 제가 재미있게 읽은 책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의 역사'를 통해 배우고 공부한 합스부르크가문의 역사와 더불어 명화의 해설을 몇 가지 담아보려 합니다. 인문학 덕후들이라면 행복할 수 밖에 없는 '예술과 역사의 만남'이니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번 포스팅의 목차입니다.




①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광녀 후아나

사진 출처: 책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의 역사'

상복을 입은 여자. 배를 보아하니 임산부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녀 앞의 관과 그녀를 지켜보는 사람들.

그런데 사람들의 표정은 고인을 기리는 슬픔이 아니라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는 듯한, 질려버린 듯한 표정이다. 과연 이 그림이 담고 있는 역사는 무엇일까? 검은 옷을 입은 여주인공의 비통함과는 대조대는 주변인들의 반응은 왜 연출된 것 일까? 왜 조금만 더 가면 있는 언덕 위 수도원까지 가지 않은걸까?


에스파냐 왕족 역사상 최고의 여주인공을 뽑는다면 당신은 누가 떠오르는가?


만약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후원한 이사벨 여왕을 떠올렸다면 지금 하던 행동을 멈추고 일명 '광녀 후아나'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를 권한다. 아무런 정치적 업적 없이 그저 내부에서 무너져간 여인이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당신의 생각도 바뀔 수 있을 것 이라고 믿는다.



1496년경 그려진 후아나의 초상화.

재색을 겸비해 칭송이 자자했던 16세 후아나는 합스부르크가의 장남인 부르고뉴 공 펠리페가 결혼 상대로 정해졌을 때 기대담에 가슴이 설레였다. 한 살 연상인 펠리페는 부친 막시밀리안 1세와 전혀 닮지 않은 미남이라는 평판이 있었고 (실제로 '미남왕' 펠리페라고 불렸다고 한다.), 머지 않아 합스부르크의 영지를 전부 물려받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496년, 아직 보지 못한 남편과 왕국을 향한 꿈에 한껏 부푼 채 후아나는 고향을 뒤로하고 먼 길을 떠난다.

사진 출처: 책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의 역사'


후아나는 부르고뉴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예고도 없이 마중을 나온 펠리페와 마주쳤다. 젊은 두 사람은 한 눈에 서로를 마음에 들어했다. 소문대로 아름다운 그를 만난 후아나는 사랑에 빠졌으며,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후아나의 이국적인 매력을 느낀 펠리페 또한 그녀에게 끌렸던 것 같다. 정식 결혼날까지는 며칠이 남아있었기에, 그는 즉각 마을의 사제를 불러들여 그 자리에서 형식적인 식을 올린 뒤 신부를 안아들고 침실로 데려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장녀에 이어 후계자인 아들 (훗날 카를5세)까지 무사히 낳은 뒤로는 펠리페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했다. 펠리페는 아내가 지겨워졌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고 후아나도 곧 알아채게 되었다. 자신이 반했던 그의 매력 또한 오랫동안 사창가에서 농탕질을 해서 익힌 것 이었다는 걸. 사랑의 기쁨이 컸던 만큼 그녀의 충격도 엄청났다. 그 결과 질투에 사로잡힌 후아나는 주위에서 병적이라고 여길 만큼 히스테리를 부리게 된다.



그러는 동안 후아나는 카스티야를 계승하기로 결정되어 절차를 위해 에스파냐로 향한다. 고향에서 후아나는 임신하지만 펠리페는 계승 절차를 마치자마자 혼자 냉큼 돌아가버렸다. 임신한 몸이기에 어머니의 만류로 고향에 머무르게 된 후아나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신이 더욱 불안해졌다. 출산 후 곧장 부르코뉴로 돌아간 후아나는 시녀들 중 남편의 정부를 발견하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는 등의 난폭한 행위를 일삼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어머니 이사벨 여왕이 서거하자 펠리페와 후아나의 아버지인 페르난도의 대립은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카스티야의 여왕은 후아나인데도 두 남자가 실권을 둘러싸고 싸우게 되었던 것. 이러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후아나는 또 다시 임신하게 되었고 펠리페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후아나는 마침내 방황하는 영혼이 되어 남편의 시신과 함께 에스파냐의 황야를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명목상으로는 남편이 원했던 매장지인 그라나다로 옮기기 위해서였지만, 사실은 남편의 시신을 합스부르크가에 빼앗겨 같은 묘지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 항상 밤에만 이동했고, 그조차도 멀리 돌아다거나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등 발길 닿는대로 무작정 걸었다고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후아나는 발작적으로 행렬을 멈추고 미사를 드리게 하거나 관 뚜껑을 열어 안을 확인하고는 했다.시신이 제대로 있는지, 혹시 되살아나지는 않았는지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는 듯 하다.


그 시기가 얼마나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몇주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반년 정도였다.', '유폐될때까지 만 2년 이상이었다.' 등 다양한 설이 전해진다.

사진 출처: 책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의 역사'


이러한 저주받은 행진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리는 없었다. 실권을 쥐게 된 아버지 페르난도는 29세의 후아나를 토르데시야스궁전에 유폐했다. 후아나는 궁전에서 시녀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힌 채 75세의 장수를 누렸다. 단조로운 일상 덕분인지 광기 어린 발작은 다행히 진정되었고 결코 여왕의 자리를 내주지 않은 채 죽을 때까지 서명에 '여왕'을 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설령 이름뿐이라고는 해도 그 직함이 최후의 보루라는 인식이 그녀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 이다.


② 베첼리오 티치아노, 황제 카를 5세의 기마상


사진 출처: 책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의 역사'


다른나라의 왕과 귀족의 칭호나 이름은 발음이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카를 5세가 특히 그렇다. 카를과 카를로스의 어원이 같은건 예상이 가능했겠지만, 카를 5세와 카를로스 1세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듣나자마 세계사가 싫어졌다는 사람들도 많을 정도니 말이다. 왜 이런일이 벌어졌을까? 가장 많은 직함을 가진 황제라 불리는 카를 5세의 이야기를 파헤쳐보자.


사진 출처: 책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의 역사'

그 이유는 단순히 영토가 넓기 (유럽의 3분의 2와 중남미를 지배했다)때문이다.카를은 아버지 미남왕 펠리페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고, 외조부의 뒤를 이어 에스파냐 왕이 되었고, 친조부 막시밀리안 1세의 뒤를이어 독일 왕이 되었고, 로마 왕인 동시에 헝가리 왕이기도해서 유럽 역사상 가장 많은 70개 이상의 직함을 가졌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는 카를 5세, 에스파냐 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가 된 것 이다.


이미 알다시피, 어머니 후아나는 정신이상을 일으켰기 때문에 양육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되어 그는 합스부르크가에 맡겨졌다.


카를로스 1세는 19세에 신성로마 황제의 자리에 올라 카를 5세가 되었다. 이는 뜻밖의 고전 끝에 얻은 결과로, 카를 5세는 40년의 치사 중 독일 9번, 이탈리아 7번, 프랑스 4번, 영국 2번, 아프리카 2번 등 총 40차례나 전쟁터로 나갔다. 카를에게 "오직 전쟁에만 몰두했다."는 수식어가 붙은 것도 전혀 과장이 아닐만하다. (구체적인 내용은 책을 확인하기를 바란다.)


그는 전쟁에서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지만,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전쟁은 막대한 수입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고, 카를의 육체까지 쇠진하게 만들었다. 통풍과 천식까지 겹친 카를은 40대임에도 이미 지칠대로 지친 노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영웅다운 강인함을 세계에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베첼리오 티치아노가 등장할 차례! 카를 5세는 30대때 이탈리아에서 이 위대한 화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고 '색의 베네치아파'다운 풍부한 색채, 정교한 사실적 묘사와 온화한 화풍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그 뒤로 줄곧 자신과 가족의 초상화를 의뢰했다고 한다. 이 이탈리아인 화가는 여전히 자신이 태어난 베네치아에 머물고 있었지만, 다음 대 펠리페 2세까지 부자 2대에 걸쳐 에스파냐 궁정화가로 지내며 연금도 받았다고 한다.


재밌는 사실은, 그가 '이미 90세이므로 연금을 받고 싶다.'라는 편지를 남겼다고 하는데, 그 또한 만만치 않은 노안으로 자신의 나이를 열 살 이상 많게 속인 것 이라고 한다.


티치아노의 아틀리에에 들어온 카를 5세가 바닥에 떨어져있던 붓을 건네주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올 정도로 황제는 그의 실력에 만족했을 것만은 확실하다.



<황제 카를 5세의 기마상>은 1547년 뮐베르크 전투에서 신교도 동맹군에 압승한 것을 축하하며 이듬해 완성한 작품으로 높이가 3미터가 넘는 기념비적 대작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황제의 시선. 그는 몸을 멋지게 장식한 준마가 기세를 몰아 뛰쳐나가려는 것을 고삐로 제지하며 저 머나먼 저편, '이상의 세계'를 보고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투구의 화려한 붉은 술은 춤추고 갑주는 빛나고 있다. 오른 손에 쥔 긴 차은 용을 물리쳤다는 성(聖) 게오르기우스를 방불케하고, 가슴에는 황금 양털 기사단의 훈장을 달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뮐베르크 전투가 성전이었던 것, 황제가 승리한 것, 그러나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47세의 카를은 눈가에 주름이 잡혀있지만 날카롭고 용맹해보이는 용모에 튀어나온 주걱턱. 오로지 전진을 표방하며 왕으로서 위엄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우수에 찬 눈빛과 가히 철학적이라고 할 법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신에게 부여받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싸우고 있는 그의 사명이 드러나 초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 하다.


카를 5세의 다른 초상화


초상화가란 의뢰인, 특히 거물 후원자의 비위를 맞추는 경우가 많기에 티치아노도 모델을 매우 미화해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렸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무렵의 황제는 이미 말에 오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전장에서도 수레를 타고 이동했으므로 기마상이라는 것 자체가 허구라한다.


하지만 티치아노 또한 단순히 아부성으로 해당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이 명화로 평가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대상의 좋은 점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의뢰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장점을 좋아해 화폭에 담는 화가였다. 더욱이 모델이 카를5세처럼 강건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결코 그 특징을 놓치는 일도 없었다. 왕과 귀족들이 앞다투어 티치아노에게 초상화를 의뢰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이다.


③ '합스부르크의 주걱턱과 아랫입술'_ 막시밀리안 1세와 가족 /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사진 출처: 책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의 역사'


유전병의 사례로 유명한 '합스부르크의 주걱턱과 아랫입술'에 대해 여기서 잠깐 다뤄보려 한다. 당시 무명화가가 그린 <막시밀리안 1세와 가족>이라는 그림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뒷줄 왼쪽 붉은색 팔레트를 쓴 왕이 막시밀리안 1세이다. 옆모습이라 매부리코와 부정교합이 확연히 눈에 띄고 뒤러의 초상화와는 전혀 다른 사람같다. 그 옆에 검은색 팔레트를 쓴 사람이 후아나가 격렬히 사랑했던 미남왕 펠리페이고, 오른쪽이 막시밀리안 1세의 비 마리아다. 앞줄 왼쪽은 막시밀리안의 손자이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루크 가문을 계승한 페르디난트 1세이다. 오른쪽 끝에 있는 인물의 정체는 여러 설이 분분한데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의견이 갈린다고 한다.


주목할 부분은 검은색 팔레트를 쓰고 유독 턱이 큰 중앙의 인물인데, 바로 카를 5세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티치아노의 초상화에서는 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눈에 크게 띄지 않지만, 동시대인의 증언에 따르면 카를은 아래턱이 위턱보다 극단적으로 튀어나와 있었고 부정교합이 너무 심해 항상 입을 벌리고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실제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계속 침이 흘렀다는 사례도 있다.) 아마 초상화가 아니라 실제 모습은 아랫입술도 훨씬 늘어지고 턱도 튀어나왔을 것 이다.


이러한 우성유전은 혈족 결혼을 거듭하는 동안 자손들에게 전해졌으며, 특히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에서 극단적으로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마르가리타 왕녀의 모습 변화

고귀한 푸른 피에 아래 계급의 천한 피가 섞이는 것 보다 근친혼으로 인한 위험성을 감수하는게 낫다, 무엇보다도 '피의 순결'이 중요하다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선택. 그 선택으로 인한 피해라고 하면 나는 가장 먼저 마르가리타 왕녀가 떠오른다.


너무 아름다운 5살난 왕녀의 모습은 시간이 니자 주걱턱, 부정교합으로 인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계속해서 흐르는 침 등등으로 바뀌어갔다. 당대 초상화는 높은 지위의 스폰서에게 맞춰 현실보다 아름답게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습을 숨길래야 숨길 수 없었다는게 참 안타까울 따름이다.


④ 주세페 아르침볼도, 베르툼누스의 모습을 한 루돌프 2세

사진 출처: 책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의 역사'

많은 이들이 이 그림을 보고 '놀랍다' 혹은 '기괴하기까지하다'라고 이야기를 할 것이다.


각종 과일, 꽃, 식물로 표현된 사람의 외모. 놀랍게도 이 초상화는 황제를 그린 그림이다. 과연 황제를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이며, 이 그림을 본 황제 루돌프 2세는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


아르침볼도의 그림이 유명한 이유, 그가 황제를 기괴하리만큼 독특하게 그렸음에도 그가 총애를 받았던 이유 중 '예술적인 면모'는 아래 첨부한 영상 속에 잘 나와있다. 따라서 아르침볼도가 제작한 작품의 의도, 예술적인 이유와 전략이 궁금하다면 해당 영상을 참고하기를 추천한다.


(해당 영상은 유튜브 "예술의 이유"에서 다루어진 영상입니다.)


어쨌거나 내가 정리해보자면, 아르침볼도는 동식물, 채소, 과일, 어패류, 책 등을 세밀하게 조합해 인간의 얼굴처럼 보이게 하는 '합성 안면상'을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합스부르크가 최고의 기인이라고도 불렸던 루돌프2세는 당시 유럽에서 쉽게 접할 수 없던 동식물. 점성술과 같은 요소들에 관심이 많았고 아르침볼도의 합성 안면상은 그러한 그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아르침볼도 사계

특히 사계절을 대표하는 동식물들을 활용해 땅, 공기, 물, 불 등 세상 만물의 근원이 되는 것들이 황제를 이루고 있는 모습은 황제가 만물의 근원이며 풍요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눈치챈 그 시대 최고의 지성을 겸비한 '교양인' 이자 '학문과 예술의 비호자'였던 루돌프 2세는 아르침볼도만의 그림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책을 읽으면서 공부했던 것들, 또 특히 인상깊었던 역사와 예술 작품 4개를 꼽아 정리한 내용이다. 처음에는 책을 읽으면서 '이건 그림에만 집중한 것도 아니고, 역사에만 집중한 것도 아닌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읽어나가면서 직접 관련 내용을 찾고 공부도 하다보니 오히려 굉장히 흥미로운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평소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이미 알고 있는 작품이나 역사가 나올때는 다시 한 번 헷갈렸던 정리한다고 생각하면서 읽었고, 잘 모르는 작품이나 역사 이야기가 나올땐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느낌으로 읽었더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당연한 태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너무 비장하게 '여기서 뭔가를 배울꺼야! 빨리 완독을 할거야!'라는 마음보다는 정말 좋아하는 교양 수업을 듣는다는 느낌으로 접근하는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책이라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오스트리아의 예술', '합스부르크가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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