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교 안의 몸 - ‘잘못된 몸‘과 ‘잘못한 몸‘ 사이
3주 전쯤부터였다. 처음에는 그냥 건조증이 심해졌나, 차를 오래 타서, 겨울이라 히터와 외풍에 자주 노출된 탓인가보다 했다. 전신건조증인 쇼그렌 증후군 탓에 안구건조증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2-3일이 지나고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깼는데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눈의 앞쪽, 각막 부위가 따갑고, 시리고, 미친듯이 아파왔다. 마치 12년 전 각막이 파열됐던 그 날처럼. 그제야 더럭 겁이 났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거니 했는데, 밤이 되어 자려고 눕자 눈이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다. 눈을 감아도 통증으로 잠들 수 없었다. 약 서랍을 뒤져 인공눈물과 안연고를 넣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까운 안과는 예약에만 2주가 넘게 걸렸다. 눈을 보호하기 위해 안대를 착용했다. 양쪽 눈을 모두 가리고 눕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정말로 시각장애인이 된 것이다. 아프고 건조한 건 눈인데, 왜 내 마음이 이리도 시리고 설컹거리는 것일까.
‘쓸모없는 계집애’
깊은 어둠 속에서 흘러나온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눈이 안 보이던, 어린 내가 스쳐지나갔다.
나는 열다섯, 고등학교 1학년 때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하지만 한번도 ‘정상’이었던 적은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안경을 꼈지만 한번도 교정 시력이 1.0이 나온 적이 없었다. 0.8이 최대였다. 병원에서는 미숙아로 태어난데다 선천성 갑상선 질환으로 성장이 느려서 시신경 발달도 느린 것 같다고 했다. 몸이 아프고, 눈이 나쁘고, 장애인 동생을 둔 내게 학교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1. 초등학교 4학년. 횡단보도 건너편의 신호등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 한문 숙제를 못 해가는 일이 늘어났다.
체육 시간에 몸이 아파 교실에 남아있었다는 이유로 도둑으로 몰렸을 때는 “오해 받을 짓을 한 사람도 책임이 있다”며 “왜 건강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래도 초등학교 내내 성적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종종 반에서 1등을 하기도 했고, 국어, 국사와 사회, 도덕은 1등을 거의 놓치지 않았다.
#2. 중학교 입학식. 입학식이 끝나고 부모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반 배치고사 성적 확인과 매타작이었다. 6학년 성적과 비교해서 떨어진만큼 때린다고 했다. 첫날부터 매를 맞은 것도, 전교 석차는 147등이라는 난생 처음 받아본 세 자리 수 등수도 수치스러웠다. 내가 잘못봤나 몇번을 다시 봤다. 당시 내가 풀지 못했던 문제들은 중학교 2,3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 수준 문제들이라는 건 아주 나중에 알았다.
#3. 성적을 올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반성문도 썼지만, 내 다짐과 무관하게 시력은 점점 떨어지고 시야는 좁아져 갔다. 이제는 맨 앞자리에 앉아야만 칠판의 글씨가 보였고, 글씨가 작거나 프로젝션 TV의 화면 각도가 맞지 않으면 노트 필기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와 달리 ‘공정성’이 중요했다. 키 작고, 몸이 아프고, 안경 끼는 게 나 뿐만이 아니니, 나만 특별 대우로 지정석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매번 자리를 옮길 수도, 노트를 빌릴 수도 없어, 칠판 앞, TV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필기를 하곤 했다. 너 때문에 안 보인다는 애들의 욕설을 들으며, ‘도대체 내가 왜 이러구 있나’ 싶었다.
좁은 시야를 교정하기 위해 붉은 색 렌즈가 들어간 안경을 처방받은 날, 교문 앞에서 복장 검사에 걸렸다. ‘안경 색깔이 학생답지 않다’고 했다. 시야가 더 좁아지자 안경테에 시야가 가리지 않도록 콘택트 렌즈를 써보자고 하셨다. 교사들마다 ‘서클 렌즈‘로 오해해서 매번 해명을 해야했다. 수업 중에 렌즈가 뒤집혀서 빼내고 다시 끼우려는데 ’수업 중에 딴 짓 한다‘는 이유로 뺨을 맞았다. 쉬는 시간, 그 비싼 렌즈를 못 찾으면 어떡하나 싶어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렌즈를 찾으려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렸다. 억울하고 비참해서 눈물이 비져나왔다.
#4. 숙제를 못 하는 날이 늘어갔다. 일주일에 한 시간 있는 한문 숙제를 하는 데만 10시간이 넘게 걸리곤 했다. 쓰기라기 보다 따라 그리기에 가까웠다. 한자의 획이 헷갈려서 쉬운 한자를 앞에 두고도 이것이 날 일 자인지, 볼 견 자인지 한자의 획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세고, 또 세었다. 숙제를 하고나면 앞이 어른거리고 눈이 아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점점 숙제를 못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것’을 택했다. 어차피 못 하는데, 굳이 고생할 이유 없잖아. 노력도 하지 않고 아예 백지로 숙제를 냈다는 이유로 괘씸죄가 추가돼 날마다 매를 맞았다. 왜 교사들은 나를 포기하지 않는걸까.
#5.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10과목에 걸쳐 총 12개의 방학숙제가 나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목록을 훑어보았다.
사회 - 세계 지도 그리기
국사 - 연대별, 지역별 지도 그리기
기술가정 - 옷 만들기
수학 - 3학년 선행 문제 200개 풀어오기
아무리 봐도 내가 할 수 있는 숙제가 없었다. 담임은 안 해오면 한 개에 10대씩 매를 때리겠다고 했다. 나는 그나마 간단한 숙제 두개만 하고 나머지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노력이 무의미해보였다.
개학식 날, 담임은 정말 매를 들었다. 당구 큣대로 100대를 맞을 자신은 아무래도 없었다. 내 앞의 애는 50대를 맞고선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기어이 울며 불며 100대를 채워야 했다. 왕따 가해자에게 연민을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지적장애학생도 예외 없이 매를 맞았다.
숙제를 못할만한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던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을 때, 망설이다 손을 들었다. ‘아파서 못했다’ 그게 내 이유였다. 담임은 결국 나를 봐줬다. 우리 반에서 유일한 예외. 내 생애 가장 비겁한 행동이었다.
나는 ‘아프지 않았다.‘ 그 해 겨울 갑상선 질환이 관해(완치는 아니지만 병의 진행이 멈춘 상태)가 돼 약을 중단할만큼 몸은 어디 하나 아픈 데도 없었고, 팔다리도 멀쩡했다. 단지 숙제가 너무 힘들어 보였고, 힘들 걸 알기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내게는 ‘장애인‘인 동생이 있고, ’몸이 약한‘ ’환자’인 나도 있었지만, ’잘 보이지 않는 상태‘를 설명할 그 어떤 언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프다‘는 내가 그나마 잘 아는, 하지만 사실에 가깝지도 않은, 비겁하게 편취한 단어의 편린이었다.
마치 타인의 고통을, 장애를, 정체성을 훔친 것만 같아 수치심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