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바넴’의 네 번째 개봉을 바라보는 복잡한 심정

by 미니

by 퀴어씨네클럽

‘콜바넴’의 네 번째 개봉을 바라보는 복잡한 심정

퀴어로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너무나 애정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그런데 한편으론 좀 꺼림칙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비(非)퀴어들이 이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이 보기 싫어서 영화가 덩달아 싫어졌달까. 개봉 당시 한껏 여운에 젖어 n차 관람한 이후 7년 만에 극장에서 이 영화와 다시 마주했다. 한국에서만 벌써 네 번째 개봉이고 무수히 많은 특별상영이 있던 것을 감안해도 여전히 많은 관객들이 극장에 가득 했다. 사람들, 정확히 말하면 성다수자들은 왜 이렇게 ‘콜바넴’을 사랑할까?


“이 영화는 우리 퀴어들 거야!”

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TV나 OTT를 켜면 널린 게 이성애 로맨스물인데 뭔 게이들의 사랑물까지 그렇게 탐하려드나 하는 괜한 용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내가 짚고 싶은 건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실제 성소수자들의 삶과 사랑에 대해선 알고 이 영화를 좋아하는 걸까 의문이 든다는 점이다.

콜미3.jpeg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 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이성애자들에게 소구력을 갖는 이유는 극도로 탐미적인 루카 구아다니노의 연출력에 더해 지극히 비현실적인 세계 위에서 펼쳐지는 철저한 판타지 영화라는 데 있다. 고상한 교수 아버지와 교양 넘치는 어머니 아래에서 한없이 풍족하고 지적인 휴가를 보내던 엘리오에게 찾아온 매끈한 육체를 지닌 백인 남성과의 짜릿한 첫사랑.


이 영화에는 현실의 누추함이 비집고 들어올 틈 하나조차 보이지 않는다.


내 첫사랑도 엘리오에 뒤지지 않게 꽤나 찬란했다고 자부하지만, 유이하게 다른 게 있다면 부유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내게는 엘리오와 같은 부모가 없었다는 것뿐이다. 이 영화를 가장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단연코 내게 있어서는 부모다. 이들의 엘리오를 향한 시선과 표정, 엘리오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내놓는 말 하나하나는 사려 깊음을 넘어 어떤 초월적 경지에 있다. 내 연애를 뒤집어엎으려 들었던 부모와 그로 인한 갈등, 현실의 구질구질함이 이 영화에는 없다.


물론 퀴어에게 마냥 열려있기만 한 시대는 아니었음을 대사로 조금씩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엘리오 주변에는 그가 게이라는 이유 때문에 고난과 시련을 부여할 만한 요소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영화는 일련의 퀴어영화들과 달리 엘리오를 두고 본인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고통보다는 아련한 첫사랑이라는 보편적 감성을 더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이성애자들에게도 소위 ‘거부감’ 없는 퀴어영화로 다가갔던 것은 아닐까.

콜미4.jpeg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 에서

내가 영화관에 가서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와는 다른 세계에 접속하기 위함이다. 비루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유리되어 스크린이라고 하는 절단면 너머로 들어가고자 하는 일종의 열망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는 영화는 영화가 가진 판타지적 측면에 있어 내 환상을 완벽하게 충족시켜주는 영화이지만, 상영관 불이 켜지고 극장 밖으로 걸어나오는 순간, 영화 속 이탈리아의 따사로운 공기와는 다른 현실의 텁텁한 공기를 더 짙게 만든다는 점에서 씁쓸한 영화다. 그래서 난 여름마다 이 영화를 꺼내보고 싶다가도 매번 플레이 버튼 누르기를 망설였는지도 모르겠다. 엘리오가 사는 비현실적 세계에 틈입하고 싶다가도 현실에 깨어나는 게 문득 두려워져서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 _모든 처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