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에바
7년 만에 보는 영화다. 이른바 ‘콜바넴 신드롬’ 을 일으킨, 대표적인 퀴어 영화로 두루두루 회자되는 영화. 같은 영화를 오랜만에 보니 자연스레 처음 봤을 때의 감상이 떠오른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나는 둘의 사랑에 집중했던 것 같다. 극장을 나서며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영화가 너무 좋았다고 했을 때, 그는 그뿐만 아니라 주인공 엘리오가 ‘성장’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보면 더 좋을거라고 했다. 그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다니, 사실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만해도 나는 ‘콜바넴’을 어느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퀴어’에 초점을 맞춰서 영화를 봤던 것이다.
‘퀴어’의 ‘사랑’말이다.
고백하자면 그때 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퀴어’를 ‘아름답게’ 연출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여서, 그래서 보고싶어졌던 것 같다. 영화는 기대한만큼 연출이 아름다웠고, 두 주인공으로 분한 티모시 샬라메와 아미 해머의 케미가 완벽하게 어우러져 그들이 만들어내는 절절한 사랑이 영화 관람의 만족감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또 하나 고백하자면, <콜바넴> 이전에 봤던 게이-퀴어 영화는 <브로큰백 마운틴>이었다는 사실은 비밀…아니 안비밀이다. 그러니 영화를 보러가는 마음가짐 자체가 한정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변명과 핑계를 지금에서야 대보며, 여하간 영화는 아주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뒤늦게 나 스스로 ‘퀴어’로 정체화하고 이 영화를 보니 역시 당시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재밌게도 이번엔 영화를 보며 많이 웃었다. 이번에는 두 남성의 납작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다 한 눈에 반해버린 두 개인의 이야기로 보니 어쩜 이렇게 노골적으로 서로 플러팅을 할 수 있는 지, 깔깔 웃었던 장면이 한 두개가 아니다. 그리고 7년 전과 똑같이 티모시 샬라메가 슬프게 눈물을 흘리는 엔딩 시퀀스를 마주하며, 이 영화는 ‘사랑’이야기이기도, ‘성장’이야기이기도, 그리고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로이 깨닫게 되었다.
슬프게도 나는 퀴어로 정체화를 한 이후로 고백도, 연애도 하지 못했다. 벽장 안에 있을 때는 스스로를 규정지을 수 없어 사랑에 우물쭈물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다보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아직까지 조금 두려운 일이다. 혹여 누군가가 사랑을 건넬 때 그걸 잘 알아보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내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선의와 배려가 어떤 감정으로 비롯된 것인지 아직까지도 헷갈린다. 그냥 ‘고’ 하기엔 내가 사랑을 할, 또는 사랑 받을 준비가 안되어있는 것 같아서 그것으로 비롯되는 아픔을 지금의 내가 감당해낼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고’ 하기도 두렵다. 그래서 이번엔 이상하게 사랑에 아파하는 엘리오가 부러웠다. 이 일로 엘리오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테니까. 그리고 ‘나’라는 사람과 더 가까워졌을테니까. 조금 더 명확해졌을테니까. 하루라도 빨리 알게된
엘리오가 많이 부러웠다.
각각의 개인은 ‘성장’을 통해 성숙한 사람이 되어간다. 하지만 나 스스로를 돌이켜보니, ‘성장’에도 분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엘리오는 나보다 어리지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앞으로 나보다 더 성숙한 사랑을 하게 되지 않을까? ‘사랑할 수 있음’은 내 사랑을 주고, 상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태라고 정의내리고 싶다. 여름이라는 계절, 찰나였지만 서로를 서로의 이름으로 부를만큼 상대의 세계에 깊숙히 빠져본 만큼, 엘리오는 앞으로 언제든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쓰고나서보니 재밌게도 <콜바넴>을 보고 여성인 내가 ‘사랑’에 대해 매우 자조적인 이야기를 하게된 것 같다. 에잇, 부럽다 엘리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아직 서툴고 어렵고 미숙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솔직해지고 싶은 것 뿐이다. 영화에서 ‘엘리오’가 ‘올리버’를 향한 감정을 받아들이고 분수대 주변을 천천히 걷다 ‘당신이 좋다’고 표현한 것처럼, 나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차근차근 노력할 것이다.